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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방으로 들어온 가을

방 안으로 가을이 들어섰다. 국화 냄새가 콧속으로 진하게 들어오는 것이 참 좋다.

낮에 마당 한켠에 피어있던 꽃들을 꺽어 꽃다발을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 놨다. 먼저 음료수 PT병을 잘라 작은 화병을 만들었다. 하나는 조금 큰 병으로 침대방에 또 하나 작은 것은 내 방에 놓았다. 실은 마당에는 진즉부터 꽃들이 피었다. 이일 저일로 바삐 보내다 보니 꽃이 핀 것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오늘 마당에 있던 꽃들을 보니 피었던 꽃들은 거반 시들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뒤늦게 나마 남은 꽃들을 보면서 불현듯 방에다 화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꽃을 방으로 들여 놓았다.

책상 한켠 포토존에는 이제 화병이 들어섰다. 바오밥 나무가 우정출연했다. 

꽃을 들여놓자생각하니 화병으로 쓸만한게 어디 있나 두리번 두리번 찾게 된다. 일주일 전만 해도 마당 한켠에 이쁜 유리병들이 몇개 있었는데 몇년동안 쓰지 않아서 분리수거로 버렸다. 몇년동안 사용하지 않아 버렸는데 일주일만에 쓸일이 생기다니. 버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버린 건 잘한 일이다. 덕분에 마당 한켠이 깨끗해졌다. 물건이란 늘 그렇다. 쓰지 않고 갖고 있을 때는 귀찮다가 막상 버릴 때는 망설이고 버리고 나면 꼭 쓸일이 생긴다.

어쨌든 유리병대신 화병으로 쓸만한 물건을 찾다가 집에 있던 빈 PT병이 눈에 들어왔다. PT병을 씻은 후에 애용하는 멀티툴 칼로 자른 후 자른 면은 라이터로 지져서 부드럽게 만들었다. 멀티툴을  사고 나서 핀잔을 많이 받았는데 의외로 이모양 저모양 많이 사용했다. 나무 깍는데, 선반 다는데, 철사로 구멍막을 때, 황동으로 된 너트를 갈아 낼 때도 요긴하게 사용했다. 나는 뭐라도 공구를 사용하려고 하면 늘 공구를 찾아 헤맸는데 멀티툴을 사고나서는 공구 찾는 일이 없어졌다. 꽤 편리하다. 간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멀티툴의 도움을 받았다. 쓸모있는 도구를 갖는다는 건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겁다. 더욱이 남자들은 그 종류만 다를 뿐 늘 장난감을 찾는다. 멀티툴은 작은 방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내게는 딱 좋은 남자의 물건이다. 

PT 물병을 잘라 만든 이 화병이 참 마음에 든다.

만들어진 병에 물을 담아 마당으로 나갔다. 어떤 꽃을 꼽을까 꽃밭을 둘러본다. 아무래도 국화가 눈에 들어온다. 향기가 진해서인지 저절로 국화에 손이 간다. 국화를 한두다발 손으로 잡고 아래부분을 칼로 자른다. 쉽게 잘려 나간다. 잘라낸 꽃다발을 내려놓고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이미 시들은 국화와 말라버린 잎사귀들을 떼어낸다. 그리고 코스모스 몇 송이를 잘라 합쳐서 꽃다발을 만든다. 높이도 안맞고 색깔도 그리 조화롭지 않다. 하지만 그 자체의 투박함이 마음에 든다. 내가 만들고 준비한 꽃다발이지만 원재료인 꽃들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인지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는 차가운 비평보다는 그저 만족스런 미소만 지어진다.

또다른 화병은 좀 더 작은 PT병으로 준비했다. 이번에는 국화를 짧게 잘라 꽃다발을 만들었다. 꽤 작은 다발이지만 역시 마음에 든다. 꽃병도 초록색인것이 가지와 잎의 녹생과 잘 어울린다. 이건 내 방에 갖다 놓았다. 방에 갖다 놓고 조금 있으니 향기가 금새 방에 가득 차 오른다. 꽃에 코를 얼굴을 들이대고 향기를 맡으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위로가 된다. 아무리 좋은 방향제를 뿌려도 거부감이 드는데 꽃 향기는 아무리 진해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희한하다. 갈 수록 나는 예전에 하지 않던 짓을 한다. 꽃을 다듬고, 화병을 만들어 방에 장식을 하다니, 예전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짓이다. 그런데 이런 비생산적인 짓이 지금 나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한다. 내 방은 어제와 똑같은 방인데 작은 꽃들이 들어선 후로는 전혀 다른 방이 되어 버렸다. 이전에 알던 그 방이 아니다. 이전 책상은 책들이 어지럽게 올려져 있었는데 꽃이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지럽지 않고 조화로워 보인다. 단지 꽃다발 하나가 책상위로 올라왔을 뿐이지만 방 분위기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 기분 또한 바뀐 듯 하다. 

자신의 인생이 지금 가을같다고 생각된다면, 무엇인가 열매를 얻기 위해 열심히 뛰는 그런 생산적인 일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끌리는 무엇을 얻기 위한 쓸모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쓸모있고 없고, 돈이 되고 안되고, 성공이 되고 안되는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면 정작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더욱이 모든 것들이 다 있으면 좋겠지만 혹 그것들이 없어지고 또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손을 피면 당장 잡을 수 있는 그런 꽃같은 아름다움과 소중함들을 놓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가을이 오고 꽃이 피어도 가을이 내 맘으로 들어와야 그제서야 가을이 느껴지고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것이 어디 가을뿐이겠는가. 늘 보고 듣고 냄새를 맡지만 정작 그것들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과 사람들, 일상의 작은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무엇을 한번 느껴버리면 그 다음 부터는 세상이 달라 보인다. 느낄 수 없었던 그것 하나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전에 느끼지 못했던 다른 여러가지들 또한 같이 느껴진다. 꽃 하나를 깊이 있게 느끼고 그 향기를 맡아버리니 가을도 이 세상도,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새롭고 짙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하나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 그 하나를 내 마음에 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그것이 좋아서 그것만 바라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사랑을 갖는다. 

오늘은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가을의 짙음을 경험했다. 꽃이 보이고 그 향기가 코에 들어와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직접 꽃을 준비하고 그 꽃들을 방안에 들여놓는 쓸모없는 일을 했다. 하지만 지금 가을은 내 방으로 들어섰고 꽃 향기는 마음에 남아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꽃병을 다시 본다. 지금 저리 이쁘고 짙은 향기를 내뿜지만 얼마 안있으면 저 꽃들도 사그라들게 분명하다. 그 때 쯤이면 가을도 물러서고 새로운 계절이 성큼 다가설거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또 그 시간이 주는 무엇인가가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상상한다. 그것이 다 져버린 앙상한 나뭇가지든 들판에 떨어져 말라버린 볏단이든 그 어느 것이 될지라도, 준비된 계절의 선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오늘 그러했듯이 때로 내 맘과 눈을 열어 내게 손짓하는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방으로 내 맘으로 그들을 초대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분명 자기들만의 모양과 향기로 내게 좋은 것들을 선물할 것이다. 바로 오늘 이 꽃들이 내게 좋은 것들을 준 것처럼 말이다.

투박하게 꼽혔지만 그것이 더 사랑스럽다. 꽃은 내가 만들지 않았지만 담아놓은 것은 내가 한 것인데 마치 내가 저 꽃을 만든 것 마냥 마음이 뿌듯하다.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처럼 공허한 것이 없다. 무엇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비참함 또한 더욱 처절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하지만 오늘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꽃과 향기를 느낀 것만으로 의미있고 풍성한 하루였다. 방에 국화 냄새가 진하게 난다. 오늘 방 안으로 들어선 가을이 이 밤 더욱 짙은 향기로 내 방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