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종교의 생존방식 (리처드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신에 대한 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이 어떻게 밈 풀 속에 생겨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독립된 ‘돌연변이’를 여러 번 거쳐 발생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아주 오래된 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일까? 위대한 음악과 예술의 도움을 받은 말과 글을 통해서다. 그러면 그 밈은 왜 이와같이 높은 생존 가치를 나타내는가? 여기서 말하는 ‘생존가치’는 유전자 풀 속 유전자로서의 값이 아닌, 밈 풀 속 밈으로서의 값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질문은 문화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갖는 것이 도대체 어떤 성질 때문일지 묻는 것이다.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위약(가짜 약)과 같이 상상을 통해 그 효력을 갖는다. 이것이 신의 관념이 세대를 거쳐 사람의 뇌에 그렇게 쉽게 복사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의 문화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높은 생존가치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의 형태로만 실재한다. “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 중에서)
작년부터 지금까지 진화론 서적들을 보는 중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설명한 책들과 특별히 리차드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들 몇권이다. 이 책들을 읽는 이유는 이 책들에 대해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온 요약된 글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이고, 이쯤되어서 진화론의 흐름도 공부하고 정리도 할겸해서다
요즘은 리차드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고 있다. 전에 한 번 읽긴 했는데 그때는 그냥 심드렁하게 읽기도 했고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지금은 나름 정독을 하다보니 이전에 보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이는 것이 재미있다.
특별히 위에 인용한 부분은 11장 “밈 - 새로운 복제자” 에 나온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무신론자이자인 도킨스인지라 그의 냉랭하고 조소 섞인 말투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내 생각에는 그의 종교에대한 이해와 비평의 수준은 버틀란트러셀이나 니체보다는 한참 아래같다.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들이 하던 얘기와 비슷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지만 발췌한 부분과 같이 종교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손뼉을 칠만큼 냉철하고도 분명하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 존재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속에 자리잡은 신 혹은 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유지되고 확산되었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의 통찰이 놀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신 혹은 신의 개념은) 어떻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일까? 위대한 음악과 예술의 도움을 받은 말과 글을 통해서다”. 신앙과 신이라는 개념과 실존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고 확산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의 답은 간단하다. 위대한 예술과 음악, 말과 글이라는 것이다.
열성적인 기독교인은 종교행사에 참여함에 열심을 낸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교리를 지키는데 힘을 쏟는다. 반면 열광적인 기독교인은 초월적인 현상과 신비를 체험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낸다. 종교행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사를 통해 경험하는 초월적 경험을 중요시한다. 종교적 열성과 열광이 윤리적인 사랑과 정의로 나타나는가 아닌가하는 것은 종교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순전히 그 사람 개인적인 의지와 가치관에 달려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두 부류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전도다. 전자의 사람은 비기독교인에게 교리를 전하며 종교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한다. 후자의 사람도 비슷한 접근을 하지만 좀 더 초월적인 그 무엇을 느끼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신비한 기도의 응답이라든지 신기한 경험이라든지.
그런데 리차드도킨스의 말은 다르다. 내가 이해하고 내 식으로 풀어내자면, 그런 것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종교는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대해야 하고 말과 글에 그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적극 공감한다. 현대의 기독교, 아니 개신교는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 위대하지도 않고 말과 글에 예술성도 깃들어 있지 않다. 인간과 세상의 현실이 없고 그것을 넘어선 인간의 아름다움과 희망도 없다. 너무 정형화 된 상품처럼 전락했다. 교회 행사와 음악에서 위대함과 예술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킨스는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 가치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는 고쳐진다고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을 말하기를 주저한다. 좀 배웠다 하는 지식인 종교인들은 지옥과 천국을 말하길 두려워한다. 지옥을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라는 힐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름 이성적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천국과 지옥을 잃어버린 기독교에 어떤 종교적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천국과 지옥이 없는 윤리적인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그리 나은 종교는 아니다. 결국 기독교는 이성적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종교적 힘은 잃어버렸고, 완전히 이성적이 되지도 못한 채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어버렸다. 인간과 세상의 현실을 담지도 못했고 천국과 지옥을 그려내는 것에도 실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신이,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과 문제에 해답을 주는 점에서 그 본질적인 힘과 의미를 가진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다시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든다.
요즘 기독교를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갈 바를 모르고 천천히 침몰해가는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나라의 어느 정당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 생각과 말 조차도 기독교에서 예수 이름을 빌어 먹고 사는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워서 침뱉기니 말이다.
하지만 어릴 때 얼굴이 더러우면 어머니가 침을 뱉어서 얼굴을 닦아 주기도 하셨으니, 이제는 하늘로 뱉은 침이 내 얼굴에 떨어지더라도 비늘로 덮인 눈이라도 부비고 다시금 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내가 뱉은 침이든 도킨스든 누가 뱉은 침이든간에 감사함으로 맞아주고 닦아야 하는 시기라 생각한다.
2015.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