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문방사우 文房四友
옛 사람들이 글을 쓰는 도구로 사용했던 지필묵연 - 紙(종이), 筆(붓), 墨(먹), 硏(벼루) -을 일컬어 문방사우라 합니다. 글 방에 늘 함께 있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서예는 국민학교 다닐 때 몇 번 해 본 것이 다였는데 재미도 없었고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먹 향기가 좋고 붓글씨를 쓴다는 것이 왠지 멋스러워 보입니다. 나중에 언젠가는 꼭 붓글씨를 배워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 옆의 문방사우의 필묵연은 샤프입니다. 전에는 주로 연필을 사용했고 종종 볼펜도 사용하긴고했지만 지금 내게는 샤프가 가장 친숙하고 느낌이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샤프를 만나기는 참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필을 더 많이 썼었는데요, 샤프는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든지, 무게중심이 내 손과 안맞는다든지, 내구성이 떨어진다든지 등등 이유로 잘 사용을 안한 반면에 연필은 나무를 깎고 연필심을 가다듬는 그 과정도 좋고 나무향도 좋아해서 자주 사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필심은 자주 깎아 줘야 한다는 단점이 종종 불편함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샤프를 만나게 되고 요즘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샤프는 STEADTLER에서 나온 925-35-05 모델입니다. 문방구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디자인이 맘에 들어 잡아봤더니 무게중심도 좋고 손가락에 닿는 그립감도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샤프심의 농도를 나타내는 작은 표시창도 꽤 마음에 들었죠. 그래서 바로 구매를 했습니다. 물론 샤프에 1200 이라고 쓰여있어서 이걸 단순히 1200원이라고 생각했다가 13000원을 결재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드러난 무식함은 창피한 비밀이지만요. Made in Japan 인데 1200원일리가 없겠죠.
어쨌든 요즘은 이 샤프로 메모를 하고 노트를 합니다. 못쓰는 글씨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자를 쓸 때의 느낌이 청량하고 좋아서인지 자꾸 뭔가를 쓰게 됩니다. 샤프심은 HB를 쓰다가 너무 흐려서 2B로 바꿨는데 2B는 진하고 잘 써지지만 너무 물러서 종이에 긁히는 맛도 덜하고 샤프의 날카로움이 좀 덜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B 농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꽤 만족스럽습니다. 별일이 없는 한 앞으로는 샤프심은 B 스타일로 갈 듯 합니다.
옛 사람들은 글쓰는 도구를 친구라 부르고 소중히 여겼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듯합니다. 늘 손 근처에 가깝게 있기에 친구같습니다. 더욱이 맘에도 손에도 맞는 물건들은 정말 친구와도 같습니다. 함께 하면서 서로 닳아가면서 맞춰지고 기억을 공유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친구가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함"이라는 말에 사람들보다는 "물건"이 떠오르고 그것들에 더 큰 애착을 갖는 내 자신이 조금 "한심"하긴 하지만 옛 어떤 문인은 주변 사람들보다는 주변의 물건들을 의인화 시켜서 친구처럼 만들고 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지금 내 모습도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해 봅니다. 물론 그 옛 문인이 정서와 나의 정서가 같은게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겠지만요.
어쨌든 이 샤프는 내리는듯 말아버리고 그쳐버린 비때문에 찌뿌등한 하루를 사각사각거리며 기분좋게 만들어 주는 친구입니다. 꽤 사랑스런 나의 친구, 이름은 없고 제품번호만있는 STEADTLER 925-35-05 를 이렇게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