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복달임
복날이 와서 복달임으로 마을이 분주했다. 어제 밤 늦게 까지 회관에 불이 밝더니, 새벽 다섯시가 조금 넘자 또다시 회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복날 음식을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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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는 늘 여자들의 몫이다. 시골은 여전히 1980년대다. 여자에 대한 대우나 의식이, 남자를 대하는 여자들의 태도가 1980년대다. 때리고 술먹고 노름하고 괴롭게하고 힘들게해도 내 남편이 최고요,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는 도덕과 책임을 머리에 올려 놓고 산다. 다만 복날 음식은 남자들이 많이 돕는다. 복날 음식의 최고봉 보신탕을 하기 위해서다.
마을에 있던 개들은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며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따른다. “주인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개들은 주인을 따르고 집으로 오는 수상한 사람, 나같은 사람을 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충직한 가족과 같다. 하지만 복날이 오면 마을에 있는 개들 중 한두마리는 사라져야 한다. .
누구집 개가 사라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개를 귀하게 여기고 좋아해 선뜻 개를 내놓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값을 제대로 불러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토실하고 잘 큰 녀석 한두마리가 사라진다. 묶여 있던 줄에서 풀려 주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사라진다. 일생 처음으로 얻은 자유가 마지막 자유가 된다. 주인은 개와 늘 함께 하고 개의 마지막까지 개와 함께 한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개를 어떻게 잡는지를 여러번 봤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 3마리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먹힌 기억이 흐릿하게 있다. 소가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한동안은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한다. 서른이 거의 다 될 때까지 개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며 여러사람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하다보니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대부분 개고기를 먹는다. 개고기 식용반대나 개고기 도살 처리법 같은 것은 시골하고는 아직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곳에도 애완견이나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도 개고기는 즐겨 먹는다. 도시의 애견가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중적 태도다. 같은 종류의 개지만 처우는 명확하게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시골사람들이 개를 대하는 방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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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일찌감치 집에서 나왔다. 갈 수록 시골의 특유한 시골이 싫어진다. 늘 웃어주고 그려러니 생각하는 끄덕임이 한계에 다다른지 오래다.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을 험담하고 돈을 뜯고 말도 안되는 일을 웃으면서 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과 긍훌이 솟아야 하지만 나로서는 더이상의 방법이 없다. 내 한계요 내 그릇의 문제다.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더이상 그냥 모른척하며 개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개고기가 아니라 개보다 못한 행동을 축복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거나 아니라 지적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맞고 옳다고 박수를 칠 마음도 여력도 없다. 척박함이 천박함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시골은 시골 나름대로 자신의 천박함을 명예롭게 갈고 닦는다.
복날의 나의 투정으로 가득하다. 개조차 자신의 희생을 깨깽 소리 몇마디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희생을 하기 싫은가 늘 속으로 투절거린다. 이것도 희생인가 하는 것에 딴지를 걸며 이건 희생이 아니라 그냥 참는거야 라고 혼잣말을 한다. 종교적인 말로 아직 덜 죽어서 그런것도 같다. 모든 것에 허허 해야 하지만 이제는 허허 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고 속으로는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마음만 강해지니 말이다. 때로 아닌것은 아니라는 성경 말씀을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말을 하는 나나 듣는 이나 모두 불편하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만 생각하는 시대에는 불편함은 악이다. 내가 악이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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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이라 하는데 경계가 정해지지 않아 서로들 신경이 날카롭다. 시골은 모든 것이 분명해 평화롭고 편하던 도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감으로 불안하다. 모른 척 무관심하게 사는게 최고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자신이 참아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멍멍복날이 와서 복달임으로 마을이 분주했다. 어제 밤 늦게 까지 회관에 불이 밝더니, 새벽 다섯시가 조금 넘자 또다시 회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복날 음식을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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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는 늘 여자들의 몫이다. 시골은 여전히 1980년대다. 여자에 대한 대우나 의식이, 남자를 대하는 여자들의 태도가 1980년대다. 때리고 술먹고 노름하고 괴롭게하고 힘들게해도 내 남편이 최고요,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는 도덕과 책임을 머리에 올려 놓고 산다. 다만 복날 음식은 남자들이 많이 돕는다. 복날 음식의 최고봉 보신탕을 하기 위해서다.
마을에 있던 개들은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며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따른다. “주인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개들은 주인을 따르고 집으로 오는 수상한 사람, 나같은 사람을 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충직한 가족과 같다. 하지만 복날이 오면 마을에 있는 개들 중 한두마리는 사라져야 한다. .
누구집 개가 사라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개를 귀하게 여기고 좋아해 선뜻 개를 내놓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값을 제대로 불러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토실하고 잘 큰 녀석 한두마리가 사라진다. 묶여 있던 줄에서 풀려 주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사라진다. 일생 처음으로 얻은 자유가 마지막 자유가 된다. 주인은 개와 늘 함께 하고 개의 마지막까지 개와 함께 한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개를 어떻게 잡는지를 여러번 봤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 3마리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먹힌 기억이 흐릿하게 있다. 소가 죽는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한동안은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한다. 서른이 거의 다 될 때까지 개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며 여러사람과 식사 자리를 함께 하다보니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대부분 개고기를 먹는다. 개고기 식용반대나 개고기 도살 처리법 같은 것은 시골하고는 아직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곳에도 애완견이나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도 개고기는 즐겨 먹는다. 도시의 애견가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이중적 태도다. 같은 종류의 개지만 처우는 명확하게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시골사람들이 개를 대하는 방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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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일찌감치 집에서 나왔다. 갈 수록 시골의 특유한 시골이 싫어진다. 늘 웃어주고 그려러니 생각하는 끄덕임이 한계에 다다른지 오래다.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을 험담하고 돈을 뜯고 말도 안되는 일을 웃으면서 하는 모습을 보며 사랑과 긍훌이 솟아야 하지만 나로서는 더이상의 방법이 없다. 내 한계요 내 그릇의 문제다.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더이상 그냥 모른척하며 개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개고기가 아니라 개보다 못한 행동을 축복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거나 아니라 지적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맞고 옳다고 박수를 칠 마음도 여력도 없다. 척박함이 천박함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시골은 시골 나름대로 자신의 천박함을 명예롭게 갈고 닦는다.
복날의 나의 투정으로 가득하다. 개조차 자신의 희생을 깨깽 소리 몇마디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희생을 하기 싫은가 늘 속으로 투절거린다. 이것도 희생인가 하는 것에 딴지를 걸며 이건 희생이 아니라 그냥 참는거야 라고 혼잣말을 한다. 종교적인 말로 아직 덜 죽어서 그런것도 같다. 모든 것에 허허 해야 하지만 이제는 허허 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고 속으로는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마음만 강해지니 말이다. 때로 아닌것은 아니라는 성경 말씀을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말을 하는 나나 듣는 이나 모두 불편하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만 생각하는 시대에는 불편함은 악이다. 내가 악이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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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이라 하는데 경계가 정해지지 않아 서로들 신경이 날카롭다. 시골은 모든 것이 분명해 평화롭고 편하던 도시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감으로 불안하다. 모른 척 무관심하게 사는게 최고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자신이 참아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