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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설까 생각하지만 옷을 입고 신을 신어야만 비로소 집을 나서는 것이다. 

  '어떤 옷을 입을까?' 잠시 옷걸이 앞에서 머뭇거린다. 짧은 팔을 입고 나가자니 에어컨을 틀을 사무실 때문에 긴팔을 입어야 할 것 같고, 긴 팔을 입자니 더위에 고생할 것 같다. 결국 짧은 와이셔츠에 양복 상의를 손에 걸쳐 든다. ‘어떤 옷을 입을까?’ 매일 같은 고민을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고 결국은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 매일 같은 옷을 입을 거라면 무슨 옷을 입을가하는 고민을 안해도 될텐데 늘 나가기 전에 옷걸이 앞에서 머뭇거린다. 마치 집을 나서기 위한 통과의례라도 되는 것마냥 늘 같은 생각과 행동을 반복한다.  

  옷을 입고 방문을 나선다. 방에서 현관은 불과 두발자국이다. 현관에 서서 잠시 머뭇거린다. '거리에서 산 3만원짜리 얇은 구두를 신을까?' 좀 클래식한 디자인이지만 신기에 아주 편한 비싼 구두를 꺼낼까? 구두는 두켤레다. 좋은 구두는 선물받은 구두고 싼 구두는 내가 산 구두다. 구두는 늘 두켤레다. 구두가 떨어지고 찢어져서 수선이 안 될 때가 돼야 새로 산다.

  구두는 둘 다 검정색이다. 솔직히 어떤 구두를 고를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늘 비슷한 가격대 구두 중에 검은 구두를 고른다. 옷은 늘 검은 양복이고 벨트도 검은색에 양물도 모두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구두는 늘 전날 밤에 구두약을 칠해 슥슥 닦아 놓는다. 광을 많이 내지는 않는다. 너무 반짝여도 촌스럽고 너무 더러워도 구질구질해 보인다.구두만 반짝거리면 좀 이상하다. 먼지를 떨구고 적당히 닦는다. 약간의 광택이 나는 정도가 가장 좋다. 오늘은 얇은 구두를 꺼내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다 잠시 머뭇거린다. 오늘은 많이 걸을 것 같다. 그래, 운동화를 신자. 과감하게 검은색 워킹화를 신는다. 양복에 운동화는 이상한 컨셉이지만 주위의 시선만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 이처럼 편한 복장은 없다. 

  비로소 현관문을 나선다. 복도 아래 쪽으로 아파트 주차장에 줄지어 놓여있는 차들이 보인다. 좁은 공간에 잘도 빽빽히 세워 놓았다. 아파트의 주차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로 쪽에 주차 라인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계단을 내려오며 아파트 현관을 나선다. 태양이 내리쬔다. 덥다. 뜨겁다. 눈을 들어 잠깐 태양을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한다.

  저쪽에서 얼굴을 많이 보던 아주머니가 온다. 아마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같다. '인사를 할까?' 속으로 생각하지만, 내내 아는척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인사하는 것이 웃길 듯 보여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야멸찬듯 해서 고개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걷는다. 혹시나 그쪽에서 나를 아는체 한다면 괜히 나만 예의 없는 사람처럼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마치 인사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보이게 고개를 살짝 숙인다. 하지만 굳이 그 쪽도 나를 아는체 하지 않는다면 누가보아도 나는 그저 단순히 고개를 잠간 숙이고 아래를 보고 걷는 모양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영리한 생각이다. 그래 내게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행동이 필요하다. 그런것도 아니고 아닌것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행동이 필요하다. 

  뒤 쪽에서 아이들이 큰 길로 달려 나간다. 뒤따르는 엄마가 그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는다. '얘들을 저렇게 큰길로 달려나가도록 놔두다니, 엄마가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엄마의 얼굴과 행색을 살펴본다. 그리곤 생각한다. '저 엄마의 엄마도 아이들을 저렇게 키웠겠지?'. 30여미터의 아파트 안 주차장을 걸어가며 요즘 부모들의 아이교육에 대한 문제성을 잠간 생각해 본다. '기준이 없어. 자기 멋대로 감정대로 얘들을 대해. 그게 문제야'. 내 스스로 결론을 지으며 아파트를 나선다.

  길 옆에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놓는다. 그늘이 드리워진 쪽으로만 발길을 옮기며 한참을 걷는다. 집에서 많이 나왔고 이제 전철을 타면 된다. 그제서야 나는 중요한 것을 놓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핸드폰과 지갑을 놓고 온 것이다. 힘이 쭉 빠진다. 다시 15분을 걸어 돌아가야 한다. 다시 돌아갈 15분은 한시간도 넘게 느껴진다.

  돌아가는 길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까 큰길로 위험하게 뛰어나갔던 아이들과 엄마가 내 옆을 지나친다. 아까 아파트로 들어갔던 같은 아파트 아주머니가 다시금 내 옆을 지나친다. 길 옆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걷는다. 아파트 주차장을 들어선다. 아이들이 위험하게 뛰놀지만 교육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차들이 늘어서 있지만 차들이 어떻게 늘어서있는지 주차 문제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간다. 다시금 현관문을 연다. 신발을 한쪽만 벗는다. 한쪽 발로 뛰며 방으로 들어 간다. 방에 들어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넣는다. 다시금 현관을 닫고 집을 나선다. 핸드폰과 지갑이 있어야 집을 나서는 것이다.

  비로서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