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바라보다
2014.8.19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방문 중에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에 들러서 조용히 그 빈 공간을 응시했다고 합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정지된 모습으로 빈 집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봅니다. 심지어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동안에도 꿈을 꾸는지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 것 마냥 쉴 새 없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눈으로 무엇을 볼 때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본다, 바라본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내 삶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따를 때 그렇게 말합니다. 가치나 이념을 떠올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어떤 장면과 움직이는 모습을 그리며 이른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끊임없이 바라보곤 하는 걸 보면 꽤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 이런 일은 일상에서는 드문드문 일어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는 자주 일어납니다. 더욱이 종교적인 삶 속에서는 한 두번 쯤은 경험하게 되는 신비적인 체험과도 비슷합니다. 그럴 때면 우리들은 마치 여행을 다녀 온 곳을 상상하거나 추억을 돌아 보듯이 눈은 먼 곳을 보고 초점을 잃고 마음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그 세계에 빠져들곤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죠. 이것이 온몸의 감각을 휘감을 때 그것은 마치 눈앞에 있는 실재처럼 느껴집니다.
이 마음의 그림이 심연이라 부르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려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심연에 그려진 그림을 응시하며 현실에서 이탈해 그 경험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을 종교체험에서는 환상, 신비, 이상, 꿈, 비전 등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경전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깊이 드리거나, 노래를 단순하게 오래 부르거나하는 종교적인 형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또 아주아주 드물지만 신비주의자들에게는 때때로 일상에서 예기치 않을 때 그렇게 몰입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내면의 벽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는 심연의 응시는 대개 실재로 존재하는 눈으로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되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그 어떤 것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심연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문같은 역할을 합니다. 일상에서 자주 보이는 것들이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하고, 특별히 작가의 생각과 감정의 밑바닥을 잘 표현한 예술 작품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일상이나 예술작품같이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춘 채 그것들을 은밀하게 보여줍니다. 어떤이들은 그것을 은유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추구하고 바라보는 그것을 눈으로 봤을 때 우리의 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것을 응시합니다. 그리곤 잠시 가려졌던 마음 속의 그림들과 깊은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저 밖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감춰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안에 보이지 않고 가려진 것들과 연결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의 강한 욕망의 힘과도 필적할 만한 이 그림들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추구하게 하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내 속의 그림들을 깊이 응시하다가 보면 눈을 뜨고 일상을 걸어갈 때도 마음 속에서 본 그 그림들이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 그림을 떠올리고 그 의미를 바라보며 그것을 따라 살고 싶어 집니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에서 빈 공간을 바라 본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나의 좁은 생각으로는, 박해 속에서도 종교적 진실과 인간애를 찾다가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삶을 바라보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어떤 이들에게 그 집은 그냥 종교적인 특별한 일화가 담긴 집으로 눈에서 스쳐지나가겠지만, 프란치스코의 마음 속 심연에 있는 그림들은 그 생가를 그저 지나치는 하나의 장면으로 넘기지 않았나 봅니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단순히 특별한 일화를 지닌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특별함을 넘어서 김대건 신부의 마음 속 구별된 세계속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때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강의나 열정적인 웅변보다 조용한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줄 때가 있습니다. 그 조용한 행동이 보여주는 그림같은 장면이 소란스런 소리에 길들여진 우리의 귀를 막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깊은 메세지를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마치 예술 작품이 우리의 눈을 우리의 내부로 이끌듯이 하나의 조용한 행동이 우리의 눈을 그 사람의 내부와 우리 자신의 심연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바라봄 속에서 내 자신을 다시금 바라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지,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삶과 가르침을 응시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불편하고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 할 것이란 생각에 멀리서 보거나 옆으로 빗겨가며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진지한 고민에 무색하게도, 부끄럽게도 현재의 내 모습은 마치 2천년전 순교의 삶이 있던 고대의 카타콤 동굴에 새겨진 물고기와 십자가를 곁눈질로 보면서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그것을 소개하는 훌륭한 여행 가이드’같은 모습에 가깝습니다.
눈 앞에 지나가는 수 많은 것들을 보며 내 맘을 빼앗기기 보다, 내 속에 그려졌으나 어느덧 희미해지고 나로부터 외면당한 신의 아들의 그림들을 다시금 바라보고 응시해야겠습니다. 지나간 시간들로 어느새 마음 속의 그림들이 흐려졌지만, 하루하루 다시금 바라보다보면 언젠가는 다시금 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선명한 그림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