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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비가 온다

밖에 비가 온다.

내리는 비가 마른풀과 나뭇잎들에 부딪쳐 소리를 낸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가 내린다"라고 중얼거린다. 이 말은 마법의 주문과도 같아서 일단 입에서 말이 풀리면 마음은 이미 내리는 비를 가는 실 삼아 올라가는 거미마냥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올라간다. 기억의 끝이 닿는 곳은 늘 같은 곳 같은 때 그 옛날의 그 어느 곳이다. 비는 시간을 초월한 가는 명주실 처럼 늘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며 하늘에서 내려 땅에 묻혀 살아가는 나를 일깨워 준다. 

그 때 처럼 비가 내리면 좋겠다. 비가 내리면 세상은 자신의 색을 들려 주었다. 누런 흙 밭의 푹신한 소리, 빛바랜 기와 터지며 빗방울 스미는 소리, 하늘색 플라스틱 지붕에 콩볶듯 물방울 튀는 소리, 붉은 장독대 뚜껑 고인물에 퍼지는 소리, 검은 마당 흙바닥에 흙먼지 피우는 소리, 푸른 들판의 풀들을 내리치는 소리, 사람없는 듯 창백한 마을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 황구 백구 흑구 뛰노는 소리, 멀리 개울가 누렇게 물 불어나는 소리, 어느덧 마당에 하얗게 물 흐르는 소리, 나무 처마 밑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 눈을 감으면 더욱 색은 선명해진다. 비가 내리면 늘 그 때 생각이 난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비도 보이지 않고 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 밑 사이에 앉으면 숲이 자라나는 소리만 기묘하게 들린다. 간혹 떨어지는 빗방울이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숲은 숨을 쉬고 그 특유의 나무와 흙의 향기를 더운 공기와 함께 포근하게 내뿜는다. 비오는 숲 속에 있을 때면 나무에 기대 잠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비가 내리면 늘 그 때 생각이 난다.

짙은 초록빛 숲과 들에 붉은 빛 밭과 흙들 위로 회색빛 빗방물의 장막이 펼쳐지며 온 몸을 씻어 내리는 소리가 그립다. 그 때 처럼 비가 내리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