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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어느 세계의 우울

타인의 슬픔에 참여하는 시간의 길이는 타인의 삶과 겹쳐진 부분이 얼마나 견고하게 연결되었는가에 달려있다. 감정적인 연민은 쉽게 지나가고 잊혀지지만, 내 존재 깊숙히 견고하게 연결된 슬픔은 내 시간의 일부가 되고 기억으로 남는다. 감정은 늘 진실하나 진실의 깊이는 오로지 시간을 통해 나타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시험하고 모든 것을 드러낸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힘겨워 타인의 슬픔을 볼 수 없는 이가 있고, 자신의 슬픔의 절망 끝을 타인의 슬픔으로 향하는 문으로 만드는 이 또한 있다. 대부분은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으려 한다. 타인의 슬픔을 나의 시간에서 몰아내는 것에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 있고, 타인의 슬픔을 내 시간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피곤함과 사회적인 부담감이 공존한다. 둘 사이 적절한 곳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삶의 기술이다. 가장 좋은 것은 망각의 기술이다. 세계를 잘라내고 재단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 외의 모습은 단지 모니터에 비친 가상현실일 뿐이다. 주의해야 할 유의사항은 단 하나, 피부와 피부가 눈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것 뿐.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by  
Paul Gauguin. (www.wikipedia.org)

여러 번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은 편안한 괴리감이다. 망각된 타인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나와 비슷한 타인과는 애써 만족해 하며 더욱 가까워진다. 생각과 행동의 괴리감 만큼이나, 세계와 영혼은 작아지고 얇아진다. 편안함과 공허는 친구다. 하루종일 쏟아져 나온 매연은 공중으로 날아 올라 한밤을 넘어서야 내려온다. 고독과 공허로 물에 젖은 이불마냥 축축하게 젖은 두터운 우울의 공기가 슬픔과 고독에 잠 못든 사람들을 내리 누른다. 슬픔과 고독은 친구다. 잠 못든 이에게는 슬픔 혹은 고독과 고통만이 진실이지만 그 어느것도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다. 아침이 되어 밖으로 나가면 수 없이 금이 간 너와 나의 세계는 어느새 회색빛 시멘트로 이쁘게 포장되어 있다. 거리에는 지친 얼굴에 밝은 빛을 덧씌우고 반복해 나가는 어제의 그 부서진 시간들의 모래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독과 고통은 분리수거도 되지 못 한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슬픔은 이제 TV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태양이 뜨면 모든 것은 망각된 채 다시 하루가 돌아간다. 망각된 슬픔은 기쁨의 그림자가 되어 다니지만 눈은 더 이상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세계는 점점 조각나고 그림자는 흐려지고 웃음지은 마음은 안으로부터 바스라져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