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신문"
- 신문? 새로운 소식 믿을만한 소식인가 아니면 심문해야할 새로운 문제인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20세기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 유명한 이를 몇 꼽으라 한다면 그 중에는 독일의 신학자 칼바르트가 있을 것이다. 그의 신학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기독교인이 있을지 몰라도, 그가 한 유명한 말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이다. 칼바르트의 신학에 이견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영성과 지성의 균형에 대한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칼바르트의 말을 자주 애용하곤 한다. 물론 그 말이 칼바르트가 한 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칼바르트가 말한 신문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신문의 목적과 역할 곧 저널리즘에 대한 부분이고, 칼바르트가 읽었던 "신문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바르트의 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신문을 따로 읽지 않는다. 읽지 않은 지 십 수 년이 지났다. 아주 오래 전에는 가는 곳마다 놓여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자주 보았지만 30대 중반이 지나면서 보지 않았고, 경향신문을 읽기도 했지만 그 또한 40대가 가까워지면서부터 읽지 않았다. 신문을 읽지 않게된 것에는 내적으로는 신문이 사회의 소식을 전달하는 방식과 내용을 인정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는 판단때문이었고, 외적으로는 인터넷 미디어의 발달로 신문보다 더 빠르고 더 다양한 각도의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기존 신문들이 인터넷 세상으로 뛰어들면서 다시금 정보 자체가 혼탁해지는 결과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칼바르트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묻고 싶다. "어떤 번역본 성경을 읽어야 하고 어떤 신문을 읽어야 하나요? 모든 번역본을 다 보고 모든 신문을 다 구독해서 읽으면 되나요?". 실은 질문과 같은 그런 노력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별 의미가 없어졌다. 미디어가 발달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진실과 사실을 찾아가는 긴 여정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을 듣고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더 폭력적인 말을 한다는 것을 깨달아서이다. 가짜뉴스냐 아니냐를 떠나서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심성과 지성 자체에 커다란 금이 가있고 오류가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요즘 교인들은 주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을 강화하는 소식을 더 중요하고 귀하고 진실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한손에 성경 한손에는 신문이 아니라, 한손에는 스마트폰 한손에는 스마트폰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잘못된 정보가 있는 듯 하다. 칼바르트가 말했다는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강력하고 전하는 바가 크지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칼바르트가 그 말을 어디서 했는지 모른다. 칼바르트에 대한 책을 읽다가 그 구절을 발견했고,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칼바르트가 한 말의 원래 뜻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함께 보십시오. 그러나 성경으로 신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었을 것이다. 독일어는 모르니 영어로,
"Take your Bible and take your newspaper, and read both. But interpret newspapers from your Bible".
바르트가 말한 것은 그의 신학사상 그대로 성경의 우위성에 있다. 성경의 법과 법칙을 세상 자연학문 위에 올려놓는 전제군주적인 신학형태로서의 우위가 아니라 해석의 기준으로서의 우위성이었다. 성경 자체가 갖고 있는 많은 사상과 이념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흐름 곧 사상과 믿음의 체계는 인종과 문화와 역사를 넘어 온 인류에게 받아들여질만한 공통의 가치로서 인정되었다. 종교다원주의적인 논쟁은 뒤로하고 기독교만 한정해 보자면 기독교는 종교, 곧 가장 높은 가르침이 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들을 해석할 해석의 잣대가 되고 기준들의 기준이 된다. 이것을 전적이든 과정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는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것의 도덕적인 판단과는 상관없이 세속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인은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든지 그 판단의 근거를 성서의 정신과 흐름에 비추어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성서의 뜻을 알아가는 인간이 가진 문제, 곧 문헌으로서의 경전자체의 해석과 해석을 하는 하는 인간자체의 문제 곧 해석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손에 성서를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균형감이고, 신문을 성서로 해석해야 한다는 기도교인으로서의 신실함에 있다. 여기서 기독교인의 지성이 나온다. 기독교인의 지성은 성서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것들을 보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성숙해 나간다. 성서를 해석하는 큰 흐름조차 하나가 아닌 여러개이며 각각의 해석은 서로를 이단이라 칭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우위성을 증명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형태로 발전해나간다. 성서적 사고와 이해는 세상을 이해하는 기준과 태도에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만은 않다. 충분히 적용할만하고 사용할만하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난폭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보고 듣고 사유하는 여유는 사라지고 쉽고 편하고 단순하게 전달되어지는 일에 더 빨라진다. 인스타그램만큼이나 교회의 설교도 인스타그램에 맞게 바뀌어간다. 아름다운 장면과 눈에 들어오는 한문장의 문구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성경이라는 커다란 숲과 바다에 있는 풍요로움과 풍성함과 다양함은, 배우고 알기에 귀찮고 피곤한 것이 되어버린 듯도 보인다. 남은 것은 성서없이 세상을 해석하는 것.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세속화가 되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좋은 의미로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약점이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사회의 악한 부분이 기독교로 침투에 기독교의 비평적 능력을 무너뜨린 것이다. 한 손에 성경을 들지도 않을 뿐더러 다양한 신문을 보지도 않게 되었다.
옛날에 신문지는 화장실 갈 때 챙겨가는 휴지였다. 보고 나서 모았다가 학교에서 폐지 제출할 때 내는 것이었고, 화장실 휴지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휴지를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에 앉아서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신문을 읽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쓸모있게도 사람의 더러운 것을 잘 닦아주며 변기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이제는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 온라인에 떠도는 신문도 보지 않는다. 제목이 눈에 띄지만, 주장과 사실과 감상과 바램과 선전과 선정적인 것을 구분할 정도는 되기 때문에 굳이 내용을 보지는 않는다. 다소 무책인한 것 같긴 하지만 읽고나면 늘 후회를 많이 하기 때문에 읽지를 않는다. 가끔 아주 긴 특집 기사같은 형식의 글을 읽으려고 노력을 할 뿐이다.
신문은 새로운 소식인가 아니면 믿을만한 소식인가, 그것도 아니면 말장난이지만 새로운 문제거리인가? 지금으로서는 그저 익숙한 문제거리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지금같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기독교인라면 더욱 성서적인 믿음과 가치관을 배우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익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돈이 되는 것도 권력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날 주님의 평가 앞에 조금은 감사하며 경외하는 맘으로 서기 위해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을 심문해야만 한다. 신문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정신으로 신문에게 거꾸로 묻고 그 진실을 따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태도요 성경적 신앙이라 생각한다.
칼바르트는 독일 신학자였다. 20세 전반의 혹독한 시기를 살아간 사람이다. 나치 치하에서 많은 기독교인과 신학자들이 히틀러를 찬양하는 모습과 거짓된 신문들이 세상의 권력을 찬양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다. 심지어 당시 교회는 히틀러를 하나님이 독일의 경제와 사회의 구원을 위해 보낸 이로 고백하기까지 했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에 적극 협조했던 대다수의 교회와 목사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그런 시대 속에서 칼바르트는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보수성을 지키면서도 국가와 민족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인으로서의 자유와 가치를 지켜나갔다. 그런 그의 신학과 인생의 태도가 잘 표현된 말이 바로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로마서 주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정치, 신념, 그리고 사람의 도덕적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들은 성서의 심판대 위에 놓여지고 심문당할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히틀러의 세상도 끝난지 오래되었다. 히틀러 치하의 거짓된 것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그리고 숨겨진 악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심문하는 이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세상의 거짓된 권력 앞에서 거짓된 소식과 모함으로 심문을 당한 그리스도는 이제 진리의 검과 말씀으로 역사를 심문할 것이다. 그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에 거꾸로 세상을 심문하고 바라보는 자로 살아간다.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모든 착함과 위대함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고 악을 행한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세상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악한 세상과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이라는 두 눈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지켜보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 신문을 보고 인터넷을 보면서 그것을 환상과 계시와 말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말씀과 환상과 계시인 성서를 마음과 머리와 삶에 품고서 세상을 해석하고 질문하고 심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칼바르트가 말한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말의 뜻이 아닌가 싶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함께 보십시오. 그러나 성경으로 신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 칼 바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