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 미술관을 다녀왔다. 전시회를 보러 갔는데 회화전으로는 모딜리아니, 보테르, 키아가 있었고, 사진전으로는 수중사진작가 제나할러웨이의 전시회가 있었다. 키아라는 이름의 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고 안내장에 적힌 그림을 보니 독일 표현주의 그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왠지 끌리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그림 한 두장만 알고 어떤 화가인지는 전혀 몰랐다. 그냥 목이 길고 얼굴도 긴 유명한 누드 그림이 인상적인 유명한 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강한 색깔의 그림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서 조금 갈등이 생겼다. 보테르는 전부터 좋아했던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하다는 모딜리아니는 잘 모르면서도, 보테르의 그림은 지난 몇년동안 모니터로 참 많이 보고 좋하했다.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보고는 직접 보테르의 그림을 보고 그 색깔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술관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보테르를 보기로 거반 결정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현관을 들어가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제나의 수중사진이었다. 제나의 사진을 보자마자 머리속을 메우고 있었던 보테르는 물로 씻겨 나간듯 사라져버렸다. 색감도 강렬했고 분위기도 신비로운 것이 눈을 잡아 끌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David La chapelle 의 사진전에서 본 수중 사진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David La Chapelle의 사진을 좋아한다. 고전회화와 같이 이야기가 있는 방식이 맘에 들고 화려한 색감도 구도도 좋아한다. 원래 상업사진에서 출발하고 성공했던지라 마치 보그잡지를 보는 듯한 화려함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더욱이 뒤늦게 "회심"(?)을 했는지 여러가지 무겁고도 중요한 주제로 사진을 담아내는 점도 꽤 맘에 든다. 다큐멘타리같은 무게감과 진중함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치 빅토리아 씨크릿같은 패션쇼같이 화려하고 수려한 옷과 색들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때문인지 사진도 주제도 부담없이 내 머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의 사진이 맘에 들어 전시회 도록도 사고 전시회를 세번이나 갔다 왔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 나만의 비밀이다. 이정도면 내가 그의 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라샤펠의 사진전에서 수중 사진 몇점이 있었는데 그 사진들은 당시 내게 큰 감동을 줬다. 큰 물속에 잠긴 듯 깊은 우울과 슬픔을 겪고 있던 시기였던 까닭이었는지 물 속에 떠있는 사람을 촬영한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날 것같은 위로를 얻었다. 당시 사진은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로 인쇄되어 벽에 걸려있어서 그 감동이 더 컸다.
그런데 오늘 간 미술관에서 바로 그 수중사진전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비록 이름은 모르는 작가지만 기대를 하고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작품을 보고 나온 감동은 별로 없었다. 기대를 꽤 많이 하고 들어갔던 까닭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작가가 말을 보고나니, 그의 사진에 사람의 감춰진 것들과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살펴봤는데, 내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쁘고 멋진 드레스와 공주님 왕자님같은 환상적인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의 사진도 너바나의 앨범에 있는 아이 사진 그 이상도 아닌 듯 싶었다. 물이 주는 투명함과 무게감과 출렁이는 공간감, 그리고 어두운 물 속에서 조명을 받으며 드러나는 사람의 의식과 존재감.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멋진 사진인것만은 분명하다. 그 한장을 담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참았는지 상상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수영을 못하고 물 속에 머리를 담그지 못하는 나로서는 모델들의 노력과 도전이 정말 물 건너 세계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재미있는 것은 들어온 사람들이 거의 다 20대 여자라는 점이었다. 패션 스타일도 멋지고 한 미모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반면에 모딜리아니와 보테르 전에는 아주머니들도 꽤 많이 들어가는 듯 했다.
어쨌든 만족스러운 전시회는 아니었지만 나름 의미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금 라샤펠의 사진 도록을 펼쳐보면서 지난 몇년의 시간을 돌이켜 봤다. 물 속에 잠겨있듯이 우울함의 바닥에 가라앉았던 시간들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내 자신을 돌아보니 물에 나와 첨벙첨벙 뭍으로 걸어가는 모양과 비슷해 보인다. 물에 젖어 무겁고 아직도 끝에서는 물이 흘러내리는 옷이 불과 얼마전까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얼굴과 손등으로는 저 위의 태양이 느껴지고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시원하게 느낄 수 있다.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바닥 없는 무저갱 물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덧 떠올라 이제는 흙을 밟으려 발을 디딛고 있다. 모든 것들이 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람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다시금 걸어볼 만한 꿈과 용기도 생겨났다. 요즘 하고 있는 일들도 그러하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한걸음 한걸음 그리 나쁘지 않다. 원하던 것이 아니어서 조금 실망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전시관 문을 나설 때면 그곳으로부터 얻지 못한 결핍이 오히려 새로운 동기가 되어 나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혹은 미래의 꿈으로부터 지금의 내 마음과 생각을 그득하게 채워주곤한다. 삶도 일도 전시회를 가는 것도 비슷한 것이 있나보다.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또한 아니다. 나름 만족스럽고 기쁨과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오늘 다녀온 전시회는 비록 그 자체로는 내 맘에 꼭 들지는 않았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내 맘이 더 풍성해지고 위로가 있었으니 꽤 만족스런 전시회였다고 평가해도 되지 않나 싶다. 나와는 다른 취향과 기억으로 그 사진들을 깊은 의미로 바라본 이들또한 있었을테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미술관은 나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나와 세상을 다시금 바라보게끔 만드는 성소와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이다.
꽤 만족스런 하루가 저물어 간다. 물 속에서 헤엄치는 좋은 꿈이라도 꾸면 더욱 멋진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