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바닷가에 가서 모래사장에 누으면 꼭 무엇인가를 그리곤 한다. 잘게 부서진 가루 위에 선을 그어 무엇인가를 쓰거나 그린다.  그저 멍하니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들 위에 내 머리 속에 있는 풍경과 생각들을 써놓는다. 사람은 늘 그렇다.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감동하고 감탄하지만 거기에 꼭 나만의 이야기와 무엇인가를 남겨 놓으려 한다. 

하늘에는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은 수 많은 별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감동하지만 이내 그 별들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걸어 놓는다. 별하나에 이야기를 담아 놓기에는 부족해서인지 여러 별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만들고는 거기에 긴 이야기를 걸쳐 놓는다. 처음에는 그저 하늘에 아름답게만 빛나던 별들은 곧이어 신기한 탄생과 왕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아름다운 로맨스로 발전하고, 배신과 욕망의 사랑으로, 그리고 허무한 죽음으로 치닫는다.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영웅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끝을 맺지 못한 채 계속 바뀌고 돌고 돌며 끝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그 많은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잊혀진 채 고대의 어느 책에만 글자로 기록되어 버렸다. 이야기들은 다 잊혀지고 별들은 다시금 저 하늘에 그냥 별처럼 걸려있다. 오늘 도시의 사람들은 하늘에 어떤 별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산다. 깊은 밤 도시의 산에 오르면 더이상 은하수와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별들과 은하수는 땅에 흐른다. 저기 한강을 끼고 차들이 비추는 라이트로 이뤄진 은하수 물결이 흐르고 있다. 도시에는 수 많은 네온 사인이 번쩍이며 하늘의 별들을 대신한다.  

도시는 하나의 우주와같이 바뀐다. 수 많은 별들이 떠오르고 별자리를 이루고 움직인다. 저기 한 곳에는 탄생의 별이, 저기에서는 죽음이, 저기에서는 사랑없는 욕망들이, 저기에서는 애틋한 사랑이, 저기에서는 탐욕의 화살이, 또 저기에서는 사라지는 존재들이 자기 이야기를 감춘 채 반짝인다. 은하수와 별들의 무리들이 강이되어 흐른다. 하지만 그 어느 곳도 다다를 수 없다. 그 어떤 곳도 익숙치 않고 그 어떤 별도 가까이 볼 수 없다. 그리고 가까이 빛나는 별들이지만 우주의 광활한 만큼이나 서로 떨어져 있다. 사라지고 죽어가는 별들과도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보이지 않게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같은 어둠이 그 어둠 뒤에 숨어 있어 죽음을 뿌린다. 도시의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야욕의 신화를 만들어 내며 그 빛을 발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생명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몇미터 떨어진 빛들은 백만광년만큼이나 서로 멀리 있다. 

한 때 그 네온 사인들도 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추억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불빛을 보며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 도시 어느 모퉁이에 있는 사람만이 불빛을 보며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릴 뿐이다. 도시의 불빛들이 갖고 있던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사라진 채 책 어디 한 구석에 글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늘의 별들에 대한 이야기를 잃어버린 이들은 이제 도시의 별들에게도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초점없는 눈으로 그것들을 지나친다. 스위치가 내리면 도시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누구도 그 불빛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둠에 익숙해진다. 

사람들도 작게 빛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만 누구도 그 이야기와 빛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모래알과 모래알같은 별들과 별들과 같은 네온 사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모래와 별들과 네온 사인에 이야기를 걸어대던 사람들도 모두 부서지고 사라져 버렸다. 

원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러하듯이 이제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낡아버린 책 귀퉁이에만,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그럴듯한 이야기로 남아있을 뿐이다. 

[상상] 결핍 2

[상상] 결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