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으로, 신비적인 계시와 초월적인 성령의 역사를 확신하며 강조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타고난 이야기꾼-스토리텔러라는 거다. 자신이 경험한 사건과 삶에 의미를 두고 해석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게 사람의 삶이라지만, 종교적인 스토리텔러는 그런 이야기를 보다 능숙하고 강한 형태로 만들어 낸다. 겉보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물체와 물체,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시간과 시간 사이의 빈 공간을 해석하고 이야기로 바꾸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야기는 번복될 수록 변화되어 정형적인 틀거리를 갖추어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이야기를 듣는 대중은 환호한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대중의 마음에 꼭 들어맞는 요소를 갖는다. 대중적인 기호에 맞게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지만 모두의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니다. 해석과 이야기로 채웠지만 원래는 비어있고 알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적당히 부풀리고 줄어들고 강조된 무용담으로 들려질 뿐이다. 이야기꾼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 "어... 내가 알기론 그건 그게 아니라, 이렇게 되서 그런거 아닌가요?”. 이야기의 사실성과 이야기꾼의 진실성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다.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에 의하면,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사람의 노력은 "권위나 권력지향"이 되거나 혹은 "허세나 허풍"으로 가기 마련이라는데 과도하게 부풀려진 스토리텔링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다. 물론 권위를 얻기 위해서 허풍과 허세를 부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일을 많이 보다보면 이게 꽤 멋지게 보이는 까닭에 삶의 기술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내용없이 과하게 포장된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껴 거부하거나 싫어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그걸 좋아하는 것도 모두 사람들의 기본적인 성향이라 생각하면 이것은 종교적으로 잘 활용해야할 종교마케팅 기법이 되기도 할 것이고, 마케팅보다는 종교 자체의 영성을 더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이라면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할 내면의 싸움이기도 할 것이다. 안으로는 영성적으로 적극적인 성찰을 하며 밖으로는 적절한 마케팅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생각만큼의 결과를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 경우에는 현실적이든 이상적이든 한 때는 이렇게 어떤 때는 저렇게 여러가지를 시도해봤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다른 이들의 삶을 살며시 들여다 보았지만 내면과 외양에 있어 균형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영성과 마케팅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까닭에 아직까지는 그저 이상에 불과한 듯 싶다.
비슷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너무 감동에 무감각해진 것도 같고, ‘이건 아닌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에 감동받는 위험과 짜증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면역능력이 생겨난 것도 같다. 빈틈없이 꽉꽉 채워졌지만 뒤는 텅빈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이제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식상하고 질려 버려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은, 전에 했던 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부풀린 듯 그럴 듯한 이야기롤 들리지 않았을까하는 거다.
내 앞에 놓인 이야기 재료가 산더미 같은데 타인의 시선과 귀를 의식하며 글자로 기록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버린다. 감동받기 보다는 감동시킬 수 있는 기술만 늘어간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생산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과도하게 해석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시선보다는 내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며 건조하게 풀어나가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 타인을 얻기 위해서라면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좋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가슴이 말라가며 견딜 수 없는 수치를 주는 부풀려진 이야기라면 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그만 두는 것이 더 낫다. 몇명이 있을지 모르지만 혹 나와 비슷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러하다. 얻지도 못한 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욕망이나, 더 얻고 채우려는 욕망에 쫓기는 마음에서 벗어나, 현실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차갑고 쓰라린 노력이 절실하다. 세상과 사람에게 이야기는 여전히 필요하고 이야기꾼은 여전히 이야기를 한다. 기계로 뽑아낸 멋진 상품이 아니라 하더라고 각자의 진실함이 들어있는 투박함이 오히려 더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마음의 노트를 펼치면 많은 사건들이 꿈틀대며 어딘가를 향한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 당기며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에 자신의 위치를 찾아간다. 나의 상상일 수도 있고 정말 신의 섭리일 수도 있다. 불안한 확신을 넘어선 믿음 뒤에는 불안함이 없는 불확신이 기쁨어린 믿음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굳이 엮어내고 이어가지 않아도 정말 그러하다면 각자의 것들이 각자의 자리로 찾아갈 것이라 믿는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영원자의 이야기 속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겸손히 배우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때마침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런 생각을 피부와 가슴에 담아두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해석과 의미두기를 통한 나만의 정신승리가 좋았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었고 나의 시절도 바뀌었다. 타인의 눈물과 웃음에 민감해지던 시절을 지나서, 내 자신의 눈과 영원한 눈을 의식하며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기록해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 이야기꾼인 사람으로서의 숙명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밤에 심장에 얹혀진 영원자의 숨결에 조금은 덜 괴로운 심령이 되도록, 그래서 조금은 더 평안하고 감사한 밤이 되도록 내 자신에게 진실하기를 절실해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