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남은 영화 "올드보이"의 주된 테마는 "기억"이다. 타인의 삶의 수치를 어찌 그리도 쉽게 내뱉었는지, 그 쉽게 내뱉은 말이 어떻게 칼이 되어서 그 타인을 죽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잔인했던 기억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는지. 극중에서 이우진은 말한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었기에 잊어버린거다. 아무 일도 아니었기에'.
오대수는 이우진과 이우진의 누나의 사춘기 애정행위를 목격한다. 건물 안에는 에로티시즘에 잠식된 두 오누이가 있었지만 창 밖에서 그것을 본 오대수의 눈에는 남자는 보이지 않은 채 여자만 보였을 뿐이다. 그 광경을 쉽게 친구에게 말해 버린 오대수는 그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은 돌고 돌아 결국 그 여자애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소문까지 나게 되었다. 이우진의 말로는 그 여자아이는 상상임신이 되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대수는 그 기억을 모두 잊고 산다. 이우진은 말한다. 네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잊어버린 거라고. 오대수가 잠시 관심을 가졌던 여자 아이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수치를 들켜 버린다. 그리고 그 수치는 진인하게도 오대수의 말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오대수는 그 기억을 잊어버린다. 타인의 수치를 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해 큰 파국이 오나 주인공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원작 만화를 오래 전에 봤었기에 그 감동을 기억했기에 영화를 기대하며 봤는데 영화의 재미와는 별도로 내용이 원작만화와는 달라서 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원작 만화에서의 수치는 오누이의 에로티시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 밑바닥의 존재의 수치심을 강한 자존심을 포장한 채 나르시즘에 사로잡힌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도 그 아이의 존재의 밑바닥의 수치를 보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그냥 문득 보고 알아챈다. 그리고 그것을 잠시 불쌍해 한다. 그것은 지극히도 짧은 순간의 일이었지만, 한 아이는 자신의 수치가 노출된 것에 수치 이상의 수치를 느낀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것을 잊어버린 채, 정말 별 볼일을 없는 삶을 살아간다. 성장해 버린 한 아이는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을 알아챈 그 주인공이 그렇게나 별볼일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에 분노한다. ‘이정도 수준밖에 안되는 놈에게 내 밑바닥을 보이다니.’
영화와 만화는 모두 주인공에게 긴 시간의 감옥 생활을 부여하고, 최면을 건다. 최면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과거의 기억과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하지만 기억은 좀 처럼 되살아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은 되살아나고 모든 것은 끝난 듯 보인다. 영화와 만화는 모두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끝을 낸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없애는 시도를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듯 보인다. 반면에 만화에서는 주인공에게 걸린 마지막 하나의 최면이 무엇인지 끝내 말해주지 않은 채 불안함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마무리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기억하지 않는다. 결과는 가혹했고 복수도 가혹하다. 남은 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에 대한 고통과 허무뿐이다. 지옥도에 가기 전, 아직 수치와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 주는 작은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