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운동회
어릴 때 운동회가 생각난다. 운동회 날 아침은 학교 가는 길부터 달랐다. 기념품에 불량식품에 사진사들이 요란하게 학교 등교길을 장식한다. 학교 문을 들어서면 만국기로 장식된 하늘에 비니루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인다. 운동장에는 전날 미리 석회를 부어 그린 100미터 달리기 라인과 릴레이 달리기용 라인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지금 생각하니 꼭 나스카 평원에 그려진 그림같다. 아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운동복을 입는다. 나일론 재질의 위 아래가 하얀 운동복이다. 목에는 청군과 백군을 나타내는 헤어밴드가 걸려있다. 운동장에는 벌써부터 일찌감치 와서 뛰어 노는 얘들도 있다. 대부분 학부모들은 운동회가 시작한 뒤에 오기 시작하지만, 좋은 자리를 놓칠새라 일찍부터 와서 그늘이 진 명당자리에 돗자리를 펼쳐놓은 부모들도 있다.
운동회는 역시 국민체조로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 전교생 조회때마다 하는 국민체조였지만 운동회때 하는 국민체조는 왠지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행사가 시작되면 학년별 반별로 운동장 가장자리에 앉아 응원을 한다. 자기 반이나 학년이 맡은 순서가 오면 나가서 활동을 하다가 자기 반으로 돌아와 앉는다. 그렇게 한두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한다. 엄마나 아빠가 오지 않았나 살펴본다. 운동장 주변으로 들어온 엄마 아빠들은 아이를 찾기 시작한다. 엄마들은 신기하게도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한 운동장에서 자기 아이를 재빠르게 찾아낸다. 엄마는 앉아있는 아이한테 와서 "나 저기 있어"라며 돗자리가 깔린 곳을 알려준다. 부모가 오면 아이들은 의기양양해진다. 매일 보는 부모고 집에서 맞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학교 행사에 엄마 아빠가 오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의 마음은 더욱 들떠 오른다.
오전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항상 박터뜨리기다. 박은 오재미를 던져서 터뜨린다. 오재미는 일주일전에 미리 두세개씩 만들어 제출했다. 호루라기가 울리면 청군과 백군이 총출동하여 오재미를 던진다. 먼저 박을 터뜨리기 위해서 힘차게 던진다. 양쪽에서 날아다니는 오재미에 맞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다. 박을 터뜨리면 터진 박에서는 "이제 점심이다" 같은 글이 쓰여진 긴 현수막천이 떨어진다. 진팀은 아쉽지만 그래도 기쁘다. 이제 바로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점심은 김밥이다. 김밥은 일년에 몇번 먹지 못한다. 재료를 사는데 돈도 많이 들어가는 귀한 음식이다. 저마다 쌓온 김밥의 모양이 다르다. 잘사는 집 아이는 그 때는 보기 힘든 햄이 들어있고, 보통 집은 쏘세지가 들어있다. 쏘세지 없이 그냥 다꽝과 시금치, 오이 정도만 들어있는 집도 있다. 하지만 어느 김밥이나 맛있다. 간혹 김밥을 쌓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도 있고, 아빠없이 엄마가 일하느라 미처 김밥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도 보인다. 그런 아이들은 친구들이 부른다. 같이 먹자며 부르고 엄마 아빠한테 자기 친구라고 소개한다. 머쓱하지만 아이는 이내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반장은 김밥을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 선생님을 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이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리더쉽이 있어서 반장이 된 아이는 자기 김밥도 선생님 김밥도 준비하지 못한다.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유난히 부자 티를 내는 다른 아이 엄마가 선생님께 김밥을 준다. 선생님도 아이도 엄마도 웃음꽃이 핀다. 점심을 먹은 아이들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논다. 기념품 가게로 뽑기에 불량식품 가게로 돌아다닌다. 악어 모양의 집게를 사기도 하고, 입으로 불면 뿌우뿌우 소리를 내며 길어지는 막대기도 산다. 마술봉도 사고, 고무볼을 누르면 앞으로 가는 플라스틱 말도 산다.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인다. 읍네 사진관과 다른 동네 사진관 사진사들이 모두 총출동 했다. 운동회 날은 대목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학교 운동회를 내일은 저 학교 운동회를 찾아간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오후 경기가 시작된다. 진즉 예선에서 떨어진 반과 아이들은 시간이 많아진다. 응원전도 열기가 식는다.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조금씩 쪼금씩 꿈틀대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흙먼지는 풀풀 날리고 태양은 하늘 위로 올라가 더욱 뜨겁게 내리쬔다. 하얗게 빛나던 체육복은 흙먼지가 묻어 군데군데 누렇게 변해버렸다. 앉아있던 아이가 일어서며 옷이라도 털면 주변으로 먼지가 자욱하게 날리며 대번에 주변에서 볼멘소리가 날아든다. 아이들도 조금씩 지쳐간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다가 멍하니 있다가 졸기도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마지막 힘을 불사를 때가 된다. 줄다리기 경기와 이어달리기 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는 늘 애매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이기든지 지든지 하는게 희한하다. 모두가 박자가 맞아 떨어지면 줄이 옆구리 겨드랑이 안쪽으로 당겨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치 나혼자 줄을 당기는 느낌이다. 하지만 줄이 끌려갈 때면 나하나쯤 손을 놔도 아무 이상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운동회의 끝은 역시 이어달리기다. 경기의 승패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이어달리기에는 흥분한다. 같은 반이지만 친하지 않던 녀석이 달려도 그 때만큼은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이어달리기에는 항상 스타가 있다. 이쁘고 잘달리는 여자 아이, 멋지고 잘달리는 남자아이, 게다가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인 그런 아이가 있다. 가난하고 말랐지만 정말 빠르게 달리는 아이도 있다. 양말까지 벗어던진 채 맨발로 날아 오르듯 달리는 아이가 있고, 반에서 몇명만 신는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누가 달려도 멋지다. 더욱이 마지막 한 두바퀴를 남겨두고 달리는 마지막 주자는 더욱 그렇다. 학교에서 가장 잘달리는 아이들이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달리고 난 다음에는 아이들이 발로 차오른 곳에 뒤늦게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정말 바람같이 달린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흥분이 되는데 반바퀴를 뒤진 상태에서 따라잡는 이변이 일어나면 더 흥분한다.
달리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제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 운동장으로 모인다. 다시 국민체조 음악이 나오며 마무리 체조를 한다. 엄마 아빠들은 진즉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가려고 기다리는 부모도 많다. 교장선생님의 마무리 이야기가 끝나면 아이들은 운동장에 일렬로 서서 휴지를 줍는다. 부모님들이 기다린다. 아이들은 아직도 얼굴이 즐겁다. 짜장면 집으로 가기 때문이다. 일년에 몇번 먹지 못하는 짜장면이다. 소풍과 운동회, 졸업식 때만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이다. 운동회가 끝나고 집으로 들어오면 동네 아이들하고도 놀지 않는다. 몸이 파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가는 것이 즐거울 때가 없었지만 소풍만큼 즐거운 운동회, 그 하루가 끝나간다. 운동회가 있던 날은 잠도 더 잘오고 행복한 꿈도 꿨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