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우리역사 : 강만길의 현대사강의"를 읽고 있습니다. 읽다가 보니 자연스레 질문이 생겨납니다. "왜 서구 열강은 일본의 편을 들었는가?"였습니다. 결국 한국의 현대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결국 새벽에 당장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인터넷 찾아보던 중, 책장에 꽂혀있는 책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강대국의 기술패권 테크노 헤게모니(게이오기슈꾸대학 야쿠시지 타이조 지음, 겸지사)"인데요, 야쿠시지 타이조 교수가 1989년에 발표한 "테크노 헤게모니"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번역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강대국의 역사를 기술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했습니다. "총균쇠"가 떠오르는 부분도 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책 전체를 다시 읽기는 시간이 없어서 "제9장 일본의 대두와 미국일본 마찰"부분만 읽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관계로 책을 평가하며 읽기보다는 일단 하나의 정보로 받아들였습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이전에 먼저 근대화라는 과정을 겪고 수용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서구열강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 능동적인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543년 이 후로 막부는 300년간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네덜란드와 긴밀한 통상관계를 갖고 안으로 변화를 추구했고, 1854년 미국과의 조약, 1858년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조약을 거치고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들어서게 됩니다. 일본은 친영정책으로 영국의 산업과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188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친미정책으로 미국의 선진경영과 기술을 수용합니다. 정치, 경제, 산업, 금융, 군사 등 각분야에 걸쳐서 근대화를 이뤄냅니다. 그런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도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갑자기 나쯔메 소세키가 생각이 납니다)
이 책은 일본의 발전을 기술발전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바라봤기에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순 없었지만 나름 유용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다시한번 훑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더하여 일본 근대사에 대한 공부도 해야 겠네요. 일본 역사에 대해 아는 건 일본 만화밖에 없습니다. 아... 바람의 검심이 막부 마지막의 이야기를 했던 기억납니다. 과거로 타임슬립한 의사를 다룬 만화도 메이지유신이 배경이었던 것 같구요.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 정리할겸 타이핑을 했던 것을 아래에 옮겨 놓았습니다. 틀린 부분이 많이 있을테니 그냥 흐름만 참고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543년 다내가시마에 3명의 포루투갈인이 표류됨. 당시 영주가 그들이 갖고 있던 총을 본따는데 성공했다. 몇년후 1만정이상의 총을 만들어냈다. 다내가시마에서 나는 사철의 풍부함과 제철기술로 종은 더욱 발전했다.
이후 도요또미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보호로 지금의 오사까인 사까이와 오우미의 2대 총제작자가 시장을 독점한다. 당시 일본의 강철은 유럽보다 더 좋았다고 한다.
17세기에 들어서 일본은 총기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1588년 총기를 몰수하고 전국의 총기를 통제하고 이후 300년간 일본은 쇄국정책에 들어선다. 하지만 쇄국시기에도 네덜란드와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네델란드는 도꾸가와 장군가에 해군 훈련선을 증정하고 1857년에는 수리공장을 나가사끼에 건설했다.
300년의 기간동안 일본은 막부말기에 들어 신분제도가 점차 붕괴되고 부유한 상인들은 근대적인 금융제도와 상업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무사 (사무라이)들은 녹을 받는 직장인과 같이 되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들어간다. 선진국의 공업기술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제도를 모방했다. 일본이 모방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정치 경제에 영국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영국민요가 일본 창가에 들어오고 영국식 철도와 가로등이 들어왔고, 전함도 영국제였다.
1854년 미국의 폐리와 미일화진초약을, 1858년에는 영국, 러시아, 네덜라든,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도쿠가와 막부와 사카모토 료마를 내세운 삿초동맹이 대결했으나 삿초동맹이 승리하고 1867년 막부는 막을 내리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1867년 메이지 천황이 메이지정부를 이어간다. 메이지정부는 학제, 징병, 토지 등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 구미 열강을 모델로 개혁을 모색한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탄압하며 천황 중심의 일본식 자본주의와 군사력 강화에 집중한다. 또한 구 막부 말기에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들을 쇄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구미 열강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외국인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유럽화정책을 시도한다. 그런 노력은 빠른 결실을 보이진 않았지만 추후 수십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본은 개방와 쇄국정책의 일로에서 갈등하기 보다는 어떤 개방을 할것이냐로 고민했던 듯 싶다. 당시 일본은 친영과 친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러시아은 무력주의를 영국은 통상외교의 전형이었다. 결국 일본은 팍스브리티니카를 이루는 영국의 통상외교를 선택한다. 영국의 기술자와 어드바이서가 일본에 들어왔다. 외국인을 고용한 것이다. 분야별로 독일인, 네덜란드인, 미국인이 초청되었다.
당시 영국인 수석기술자의 월급은 2천엔이었고, 일본 총리대신의 월급은 8백엔이었다. 일본은 영국의 기술자와 제도를 후한 값을 치루고 고용했고 받아들였다. 철도, 기계, 건축분야에서 영국읠 절대적인 후원과 교류가 있었다.
일본은 1873년부터 영국의 글라스고 대학에서 초빙된 다이엘에 의해 공부성 산하 공학교육을 시작한다. 기계, 토목, 전신, 건축, 광산, 화학 등 6개 분야에 걸쳐 당시 영국, 독일, 프랑스의 과학기술을 융합해서 교육을 시작한다. 미국의 MIT가 1868년에 시작되었음을 생각할 때 일본 공학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은 고등과학기술보다는 산업혁명 위주의 생산성있는 기술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고등기술을 가진 영국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대거 영입되었고 동경대학 공학부를 창설했다.
하지만 정부주도로 시행되었던 영국형 개혁은 1880년대로 들어서 미국기업과의 합작으로 급변한다. 재벌회사들은 미국으로 파견해 미국 회사의 경영방식을 습득하고 일본에 다시금 새로운 회사를 설립한다. 일본은 산업혁명 후 공업형 산업체계를 갖춘 일본에서 미국형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일본은 이제 아시아로, 조선, 청, 러시아, 필리핀으로 진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