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화일이 필요하다는 분이 있어서, 맘에 내키지는 않지만 아이폰으로 두 주 녹음을 해서 CD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CD를 건내주기 전 녹음한 내용을 다시 들어보니, '교인들이 참 착하고 믿음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교인이라면 나같이 설교하는 목사가 있는 교회는 안갈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다른 큰 교회로 간 청년생각이 납니다. 말도 어색하고 내용은 그닥 깔끔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습니다. '이래서 그 청년이 다른 교회로 갔구나' 하는 생각에 괜시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인터넷만 키고 팟캐스트만 키더라도 재미있고 은혜롭게 하는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지 뭐라 말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인생에 뭔가 열매를 거두기 원하고 의미를 찾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열매는 수량으로 셀 수 있거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는 그저 변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만족을 하는 정신승리만이 남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정신승리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약점과 단점을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아직 자기의 단점때문에 주눅이 든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납득도 가지 않는 어른아이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나 혼자 일하고 나 혼자 살아가는 삶이라면 나의 단점과 약점때문에 크게 괴로워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들이 다른 이들의 성장과 열매를 가로막는 담과 벽이 된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게되면 그 때부터 밀려오는 자괴감으로부터 피할길이 없어집니다. 더욱이 단순한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뭔가 대외적으로 고매한 가치를 위해 산다고 여겨지는 삶이라면 더욱 그 무게감이 더할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갑자기 알아버린 내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제는 그 무엇보다 무거운 무거움으로 영혼을 짓누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그 때 대학 휴학시절에 입사를 권하던 그 외국인 회사에 들어갔더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신학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 잠시 들어갔던 연구소에 계속 다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함께 유학을 가자던 사람의 손을 잡았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의 삶에 의미를 잃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람은 망상을 하게 되는 습성이 있나 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들에 "만약 뭐뭐했더라면"이라거나, "지금 전혀 다른 곳으로 간다면"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다소 철없어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삶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전혀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이 따라오곤 합니다. 아마도 현실의 무거움을 잠시 잊기 위해 내 마음이 살길을 찾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봅니다. 눈 앞에는 현실에 다리를 딛고 서있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서 본 시의 어느 한구절이 생각납니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빛바랜 청동거울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의 뒷모습에는 그의 뒷굽과 목덜미에는 그의 결핍과 나약함이 서려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심장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는 무거움을 견디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무거움이 싫고 이 쓰라림이 싫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의 나의 환경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의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 뿐입니다. 나의 얼굴을 그리고 나의 뒷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무거움을 나의 양식을 삼는 것이 내가 해야할 나의 기도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내야 할 신앙의 몫은 위대한 성공이나 화려한 열매를 갖는데, 다른 분들처럼 멋지고 은혜로운 설교를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이런 내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그 무거움에 질식하지 않은 채 나의 하나님을 소망하며 다시금 현실을 희망으로 살아내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 뒤에 새로운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요, 싫어 버려버리고 싶은 내 자신에 대한 긍휼한 사랑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내 자신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감사함이 있습니다. 나의 한계로부터 오는 쓰라임과 무거움으로부터 오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존재의 진실에 대한 쓰라림만치나 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투박함이요, 나와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바라 보는 서릿발같이 차가운 삶의 의지입니다. 마음의 바닥에 웅크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 사람은 적어도 한동안은 더이상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지 않을 것이고 타인의 절망스런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폐허 속에 새로운 집을 짓고 새로운 삶의 길을 내는 순수한 삶의 의지만이 순전하게 충만합니다.
하루의 삶은 폐허와 충만함의 반복입니다. 내 존재와 연결된 지극히 작은 하나의 사실에 나는 절망하고 무거움에 쓰라리며 폐허가 됩니다. 이것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다시 한 번 내 삶의 이유와 의지를 찾아냅니다. 이것은 부활과도 같습니다. 나는 그 옛날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한 그 말에 묶여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격정만큼이나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는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 그 생명의 말은 또한 내 마음을 묶어 내일과 미래로 나를 이끌고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떤이들은 영혼에 상처를 입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풍성한 열매와 수확물을 품에 안은 채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이들의 눈에서는 나와 같은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입니다. 어떤이는 무거움에 눌려있고 어떤이는 쓰라림에 괴로워합니다. 어떤이는 그것들을 멋진 가면으로 능숙하게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며 그리고 내 자신을 보며 삶의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 정답은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지금 내가 느끼는 내 자신의 한계와 무거움과는 상관없는 별개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어떤 희망을 찾았듯이, 이제는 그 눈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삶의 희망과 이유를 찾아내고 서로를 확인하는 삶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어느덧, 귓가에 들리던 듣기 싫던 내 목소리도, 빙글빙글 돌아가던 CD도 멈췄습니다. 지금의 나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습니다. 내 모습에 그저 조금 슬프고 내 모습보다 조금 앞에 겹쳐진 희망에 은근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으로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이 이상한 느낌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은 단순히 작게 기도하듯이 마음 속으로 작게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나의 부르심 나의 영원한 소망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것 나의 목적 나의 높은 부르심. 세상을 뒤로 하고 주 위해 사는 것. 덮으소서... 덮으소서. 주 거룩한 품에 품으소서. 이곳이 나 속한 곳. 오 예수 이끄소서. 주 얼굴 보기 위해 은밀한 곳으로 내가 나아갑니다"
너무 감성적이었던 하루고 너무 진지한 종교적인 이야기였지만, 이것 또한 내 중심의 내 모습인 것은 분명합니다.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