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미움의 죽음

미워했던 사람이 죽었다. 잊었다 생각했지만 늘 내 머리 한편 미움의 방에 살고 있던 사람이다. 오래전 내게 한 약속을 어기고 내게 큰 손해를 줬던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그가 병들고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라며 냉담하게 대했다. 아픈 그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그가 죽는다면 아마 장례식장도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실은 그는 나를 기억하지도 못 할 것 같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슬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장례식장 앞에 서 있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갔다. 어떤 부분에서는 사회적 체면을 지키려는 것이 동기가 되었지만, 이제라도 그를 찾아가지 않으면 그를 미워하고 분노하던 내 모습을 평생 가지고 갈 것 같아서였다. 그는 아무런 걱정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지만 나는 남겨진 채 온갖 미움과 분노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내 편에서 뭔가 마무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갔다.

사진 속에서 그는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나쁜 사람. 적어도 내게는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 미운 그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가 미운 감정만을 가지고 장례식장 안에 들어갔던 나인데, 그의 가족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자 그 밉던 감정마저 사라져 버렸다. 분노도 미움도 짜증도 사라져버렸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가족은 나를 기억하고 고맙다며 두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 그들이 지금의 내게 고마워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 크게 똬리를 틀고 있던 분노의 뱀 한 마리가 휘리릭 빠져나가는 듯하고 그 빈 곳에는 오래전에 잠시라도 함께 놀았던 동네 형의 미소와 작은 친절에도 고마워하는 할머니 손의 따스함이 전해지는 듯했다.

장례식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차려준 밥을 먹었다. 두 그릇을 억지로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먹었다. 그에게 받지 못했던 것들을 다 받아내듯이 그렇게 먹었다. 사람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와서 인사하는 얼굴들이 보인다. 나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미운 그였는데, 미운 그의 장례식장에 왔는데 그의 가족들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내게 고마워한다. 미워했던 그가 죽어버렸는데 그의 장례식장에서 나의 마음도 나의 미움도 죽어버린 느낌이다. 아니 나의 미움도 죽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의 웃는 사진을 뒤로 한 채 장례식장에서 나왔다. 장례식에 가서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고마움을 받아 넣어 가지고 나왔다. 그에게 용서 아닌 용서를 남기고 나왔다. 용서가 아닌, 지난 모든 것들을 그냥 흘려보내듯이 그렇게 그 장례식장에 해묵은 감정들을 남기고 나올 수 있었다. 밖은 까만 밤이었다. 바람은 아직도 매우 차갑게 불고 있었다. 까만 밤거리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 때문에 미워하고 분노한 내가 있었듯이, 나 때문에 미움과 분노로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도 분명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엉킨 감정의 실타래들이, 미움과 증오들이 내 속과 주위에 만연한 듯해서 답답해졌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죽어버린 그의 목소리였다. ‘미안하구나. 흘려버리려무나.”  그 옛날 교회 강대상 위 큰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너도 흘러가듯이 그리 살려무나. 너 또한 나처럼 누군가에게는 그러할 것이니 말이다’.

돌아오는 내내, 장례식장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내가 살고 있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올 수록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삶에는 죽음과도 같은 미움과 아픔이 있지만,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용서와 삶의 담담함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아이처럼 쉽게 미워하고 짜증내며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나와는 상관없이 미움이 왔듯이 나와는 상관없이 용서라는 이름 안에서 미움이 죽어버렸다. 삶이란 게 감정이란 게 내 뜻대로만은 참 안되는구나 싶은데, 그것이 나쁠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다.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비로소 따듯한 봄이 올 것 같다. 분명 그럴 것 같다.

[종교] 광복

[일상] 이상한 저녁 (개구리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