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나무깎기

가끔 다스리기 어려운 짜증이나 분노가 치밀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겉으로는 표현은 하지 않지만 안으로는 꽤 괴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도 참아볼 만한 때에는 음악이나 독서로 해결이 되는데 더 힘든 상태가 되면 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럴 때 주로 주로 나무를 깍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독서를 한다거나 운동을 한다는 분들도 있는데, 내 경우에는 주로 나무를 깎게 되더군요. 시골로 와서 생긴 습관인데, 조그만 칼과 조각도로 아무 생각없이 나무를 깎다보면 마음과 감정이 정리되곤 합니다.

나무는 보통 공사하고 남은 조그만 각목이나 뒷산에 굴러다니는 나무 가지를 활용합니다. 그리곤 조그만 손칼을 들곤 나무를 바라봅니다. 특별히 무엇을 깎을 것인지 생각이 안나기도 하지만 계속 쳐다보면 마음에 떠오르거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깍고 싶어 집니다.

짜증과 분노는 주로 파괴적인 감정입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리 도덕적이진 못하면서 생각은 나름 도덕적인 틀이 강한 나인지라, 그런 파괴적인 감정을 밖으로는 표출하지 못하고 내 자신에게 쏟아 붓곤 합니다. 과도한 자기 비하나 금식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게 그리 건전하진 못한 것 같더군요. 자기비하의 늪에 빠져버리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또 금식을 하면가뜩이나 얇은 몸이 더 얇아지고 힘이 없어집니다. 파괴적인 욕구와 감정이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데 생활마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긍정적인 해법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보고 있다보면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괴적인 생각이 아니라 창조적인 생각이 드는 거죠. 나무를 깎는 것 자체가 내 감정과 생각 속에 있던 무엇을 끄집어 내는 것인데, 이 자체가 억눌린 감정과 생각을 해소해주는 듯 합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가는 과정은 창조적인 행동이면서도 나무를 깎아 버린다는 점에서는 소소한 파괴행위이기도 합니다. 칼로 무엇을 잘라낸다는 것 자체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마치 내 감정과 생각들이 잘려나가고 다듬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더욱이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크게 작게 세밀하게 나무를 깎아가는 과정을 통해 내 생각과 감정도 점점 세밀해지고 유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이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깊어지면서 일체의 다른 생각은 나지 않고 그저 깎는다는 행위만 남게되는 집중과 몰입도 경험합니다. 기도나 성경을 깊이 묵상할 때 경험하는 그런 몰입과는 좀 다른 형태의 몰입입니다. 전자가 좀 수동적인 능동성이라면 후자는 능동적인 수동성이라고나 할까요. 기도나 성경은 주어진 글자와 주어진 기도문 혹은 주어진 신이라는 이미지에 내 자신이 맞춰지면서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해나가는 것이라면, 나무를 깎는 것은 내 속으로 부터 끄집어낸 것들을 나무에 상상으로 그려내고 그것을 깎아가면서 오히려 내 자신이 그 나무에 맞춰지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더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두가지가 모두 소중하고 중요한 체험인 것은 분명합니다.

최근에는 마당 밑 비탈에 자라나는 은행나무 가지를 베었습니다. 전에 잘려나간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해마다 작은 가지들이 자라나기때문에 종종 톱과 낫으로 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여름철에 한번 가지를 쳐주지 않으면 은행나무가지들이 금새 자라나서 비탈길을 다 막아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톱으로 잘라버린 작은 은행나무 가지를 갖고 들어와서 깎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짜증과 분노를 깎아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 번에는 엄지손가락을 깎다가 말았는데 이번에는 앙상한 다리를 한번 깎아보자고 생각하고 칼질을 했습니다. 깎다보니까 정말 어려운 것이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깎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데로 깎으려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상과 현실이 섞여버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이상한 비율과 두리뭉실한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과물은 그닥 수려하지 않지만 내 마음에 대해 여러모로 배움이 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도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도구를 잘 못 다루는 나의 미숙함도 있지만, 문제는 내 눈과 생각이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것은 너무 과장하고 어느 부분은 너무 축소된 모습으로 왜곡해서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보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데서 참으로 서투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어느덧 며칠 나무를 깎다보니까 마음도 많이 안정이 되고 내 속도 더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무 다리는 좀 더 정리를 한다음에 열쇠고리로, 볼펜을 만들까 아니면 USB 메모리 스틱으로 만들까 생각 중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좀 우스꽝스런 모습이긴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들을 극복해내고 무너가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왔다는데 있어서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카메라로 촬영하기 위해 불빛 옆에 나무를 세워보았습니다. 가만히, 자세히 보니 아직 덜깎여 미숙한 것이 내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여러번 반복하다 보니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비록 내 모습도 내 삶도 아직 거친 나무같지만 나날이 깎여 간다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조금은 쓸모있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있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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