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먼 곳을 보기

아이는 간혹 멀리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제작년에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느라 한 여름밤을 홀딱 지샜다. 별자리 지도를 보며 밤하늘 별들을 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화 이야기를 해 주느라 시간을 보냈다. 작년에는 고모부가 사준 장난감 쌍안경으로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여름을 보냈다. 밤하늘 별과 쌍안경에 아이보다 아빠가 뽐뿌를 받아 이곳 저곳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당장이라도 망원경을 살 것 같이 호들갑을 떨며 한해를 지냈다. 올 해는 멀리있는 것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한 듯 싶다. 한달 전에 습지공원에 가서 망원경을 들여다 본 것이 다였던 것 같다. (아... 월식이 일어나 레드문이 뜨던 날 하늘을 보긴 봤지만.).

어쨌든 습지공원에 가서 쌍안경을 눈에 대고 멀리 있는 것을 보려고 했지만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잠시 흥미를 잃어버린다. 옆에 있는 부모는 그런 상황에 아이에게 적절한 코칭을 해주길 원한다. 때로는 엉뚱하게 가르칠 때도 있고, 방법이 잘못되어서 아이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 아이는 부모의 코칭을 받아들인다.

"먼저 네가 보고 싶은 것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 알기가 어려워." 
아이는 저쪽을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럼 몸을 움직이지 말고 숨도 천천히 쉬면서 망원경을 그 쪽으로 향하게 해봐"
아이는 그렇게 해보지만 망원경도 높이 있고 뭔가 잘 안된다. 의자라도 갖다 놓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보기에는 어렵다. 옆에 있던 엄마가 아이를 붙잡고 움직이지 않게 도와준다. 
"뭐가 보여?"
그제서야 아이는 뭔가가 보이는지 망원경으로 뭔가를 계속 본다. 
한두번 과정을 되풀이 하더니 아이는 스스로도 먼 곳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체득했는지 혼자서 이곳 저곳을 보려 한다.

멀리 보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쉽지 않다.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의지와 호기심도 중요하지만, 그 먼 곳을 볼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멘토가 되거나 코치가 되거나 부모가 되거나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바로 앞의 것들에 충실하게 함께 하면서도 보다 멀리 있는 것들을 바라 볼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거다. 앞에서 가리키든지 뒤에서 가리키든지 방법은 저마다 다양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과 몸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몸과 마음. 그 과정을 체험하고 습득하면 그 후부터는 스스로의 눈으로 바라본 저 멀리 있는 것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나는 인생과 사회라는 것을 멀리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고, 돈을 벌고 좋은 직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내 인생의 미래를 어떻게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설계를 해야 하는지 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는 그저 늘 착하고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라는 것을 배웠고, 책을 많이 읽고 어른들에게 늘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살라는 법만 배웠다. 그래서인지 멀리 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 몇 권의 책을 읽고 웃고 인사하면서 곧이곧대로만 살아왔던 듯 싶다. 그래서인지 멀리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깊은 한숨을 쉬며 아쉬워하기도 했따.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가 가르쳐주시고 말씀하신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로서는 최선의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것은 분명 내게도 최선의 길이었다. 내게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게 멀리 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주었다. 뒤에서 나를 안아주는 품은 없었지만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나를 사랑하는 땀과 눈물이 늘 있었다.

아이를 품어주고 그 몸과 마음을 붙잡아주며 먼 곳을 바라보게끔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요, 그리고 리더나 멘토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때로 그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형적인 틀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삶과 인생은 참으로 신비로워서 전혀 그렇지 않은 것 속에서 전혀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난 힘과 지혜를 주는 신비를 보곤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어디를 봐야 하는지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내 맘과 몸은 안정감있게 고정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내 뒤에는 그 무엇이 나를 감싸고 지켜주고 있는지 궁금해 내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저 멀리 그리고 내 뒤를 보더라도 모든 것들이 다 보이고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만은 아닌 듯 하다. 몸과 마음도 완전히 안정적인 느낌도 아니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다하여 충만하지 않다하여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결핍된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앞을 멀리 볼 때 두려움은 갈 수록 줄어들고 뒤를 돌아 보면 결핍된 날들이 아니라 생각만해도 감사한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들이 아름답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분명 아이도 완전하지 못한 부모에게서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못내 미안함이 된다. 하지만 나또한 부족함과 결핍 속에서도 결국은 나를 붙잡아 준 분과 나를 붙잡아준 분들의 사랑을 알고 걸어가고 있으니, 아이도 결국은 더 힘찬 걸음으로 저 먼곳의 날들을 바라보고 걸어가고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나를 사랑한 가족들이 그리고 나를 믿어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처럼 아이에게도 그런 가족과 하나님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아이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란 생각도 한다.

이 땅에 태어난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로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 모두가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이들의 바램과 이야기에서 새롭게 출발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허무함과 무질서의 밑바닥에서 우리의 영혼을 만들고 믿어주는 하나님의 원대한 이야기로 부터 출발한 고귀한 존재라고 믿는다. 아직도 우리들이 바라봐야 할 먼 곳이 있고 걸어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우리들은 그곳을 바라 볼 수 있고 그리고 걸어 갈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그곳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취가 눈 앞에 있고, 무엇보다도 뒤를 돌아보면 함께 했던 소중한 날들의 감사한 이들의 눈과 미소가 있다. 지극히 종교적인 상상이지만 나는 상상하며 믿는다. 나를 향해 양 손을 벌려 저 과거로부터 저 먼 미래로 나를 이끄는 신의 못자국난 손바닥이 앞과 뒤에서 이끌어 주고 있다.

하루가 지나갔다. 낮에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아는 것 마냥 자신있게 가르쳐주던 나는 홀로 방안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본다. 아이는 잠들었고, 이제 내가 저 멀리 봐야 할 차례다. 하지만 아이만큼 잘 볼 수가 없다. 하루 앞도 저 먼 곳도 보이지 않고 뒤의 수 많은 미소와 기억들도 사라진 듯 보인다. 하지만 두렵거나 슬프지는 않다. 멀리 볼 수는 없지만 저 앞에는 희망이 있고 내 뒤에는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 때마다 다시 한번 울고 웃는 그 벅찬 삶의 순간들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내게는 확실히 현실보다는 믿음이 강하고, 예측보다는 소망이 더욱 강한 힘으로 느껴진다.  

오늘 밤에는, 삶과 죽음에 그리고 역사를 나 보다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먼 곳을 바라보며 지금 이곳이 틀리지 않은 곳임을 확인하며 편안히 눈을 감고 싶다. 저 먼 곳의 그림들이 지나온 날들의 아름다운 추억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그런 꿈을 꿀 수 있을 듯 하다.

삶은 신비롭고 내일은 아직도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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