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 또한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고통을 불사하고 찾는 행복은 일종의 어리석음과 광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정도만 기억이 난다. 에라스무스를 알게 된 것은 루터를 통해서다. 마틴 루터에 대한 책을 읽다보니 에라스무스와 비교되는 내용이 자주 나왔다. 그런 차에 에라스무스의 책들을 (읽지는 않고) 고르다가 [슈테판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보았다. 슈테판츠바이크의 눈에 비친 에라스무스는 수도사였으며 신학자이자 여행가이자 인문학자였다. 합리적 이성에 매몰되어 신비를 잃는 것도 원치 않았고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싸움과 분열이 있는 것도 싫어했다.
그의 신앙은 가톨릭 전통 위에 있었지만, 당시 가톨릭에도 더욱이 프로테스탄트에도 깊은 소속감을 갖지 못한 듯 보인다. 둘의 경계선에 혹은 그 둘을 아우르는 길을 가길 원했던 듯 싶다. 아니 좀 더 기존의 틀에 박힌 종교인이나 전투적인 프로테트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종교와 이성을 간직한 인간중심의 휴머니즘을 추구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의 여신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에라스무스는 고대 희랍과 중세의 철학과 문학, 그리고 신학과 성서의 이야기를 불러온다. 그 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찬양한다. 지혜롭고 철학적인 이들의 허상을 풍자와 유머로 비판하면서도 이 세상 행복과 기쁨은 "어리석음과 그것에 대한 단순함과 열정"으로 부터 온다 말한다. 통치자와 정치인들 학자들 종교인들, 이른바 권력을 갖고 배운 사람들이 겉으로는 똑똑하고 지혜자처럼 보이나 얼마나 멍청하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지를 신랄하게 고발한다. 그는 대중의 어리석음조차 가차없이 고발한다. 그 누구도 그의 비판을 피해갈 길이 없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참다운 정치, 지혜와 철학, 종교는 어떤 모습아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비교적 가볍게 내 자신에게 던질 수 있다.
그가 인용한 자료들이 너무 방대하고 낯설어서 쉽게 다가서기는 어렵다. 다만 이 세상이나 사람들에 대해 비평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에라스무스의 이야기를 그저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 비평태인 태도를 취하던 자신조차 에라스무스의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는 그런 대가가 직접 나의 우둔한 지혜로움과 비평의식을 조롱해준다는 것만 해도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에라스무스가 수도사와 인문주의 신학자였던 까닭인지 책의 많은 부분을 당시 종교의 부정을 비판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우신예찬을 읽다가 보면 가톨릭의 부폐함에 맞서 프로테스탄트가 나왔다는 말이 달리 생각된다. 마치 가톨릭은 전부가 부폐했고 프로테스탄트만이 유일했던 개혁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많은 개혁과 성찰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성경해석과 종교에대한 시각은 오늘날의 기독교를 성찰하기에 좋은 시각을 제공한다.
이 책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노인과 여인, 대중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시대적인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지만 남다른 통찰을 엿볼 수도 있다. 그것은 책을 읽는 사람이 그 속에서 확인해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순진무구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어리석음과 광기어린 믿음과 사랑과 신비가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그의 말이다. 책을 통해 이성과 합리를 추구한 인문주의자이면서도 신앙의 순수함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어느덧 "어리석음과 광기"로 표현한 그 신앙의 열정에 함께 고개를 끄덕일 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를 더 하기 위해서 슈테판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나는 이것 또한 말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고통을 불사하고 찾는 행복은
일종의 어리석음과 광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