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종교음악] 모짜르트의 "Ave verum corpus" 아베 베룸 코르푸스.

모짜르트의 "Ave verum corpus" 아베 베룸 코르푸스.

위키피디아(아래 나오는 정보도 위키피디아의 내용)를 검색해보니 쾨헬이 정리한 작품번호 K. 618번으로 모짜르트가 1791년 6월 17일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모짜르트가 1791년 12월 5일에 사망했으니 그가 죽기 6개월 전에 작곡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 원래 라틴어 가사
Ave verum corpus,
Natum de Maria Virgine,
Vere passum, immolatum
In cruce pro homine,
Cujus latus perforatum
Unda fluxit et sanguine,
Esto nobis praegustatum
In mortis examine.
** 영어가사,
Hail, true body,
Born of the Virgin Mary,
Truly suffered, sacrificed
On the Cross for mankind,
Whose pierced side
Flowed with water and blood,
Be for us a foretaste
In the trial of death.

** 한국어 가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진정한 성체가 나심을 경배하나이다.
모진 수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것,
뚫린 가슴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네,
우리가 죽을 때에
그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

** 또 다른 한국어 가사로는, 가톨릭 성가에 적혀있더군요.

성체 안에 계신 예수
동정 성모께서 나신 주
모진 수난 죽으심도
인류를 위함일세
상처입어 뚫린 가슴
물과 피를 흘리셨네
우리들이 죽을 때에
주님의 수난하심 생각게 하옵소서. 

** 위의 내용을 토대로 노래에 맞춰 
내가 묵상한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찬양, 찬양하나이다. 참다운 육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인류를 위해 모진 수난을, 
십자가에 죽으셨도다.
옆구리를 찔리시고
물과 피를 흘리셨도다.
죽음의 때에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 시는 중세에 이름 모를 사람이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도신조로 알려진 고대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시는 참다운 육체이신 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탄생과 죽음을 설명합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 에게 나셨습니다.
그는 모진 수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는 옆구리를 찔리셨습니다.
그는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시는 가톨릭 성가에서 194번으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라는 제목으로 불립니다.  시 그대로 하자면, Ave verum corpus "참다운 몸" 혹은 성스러운 몸인데 굳이 "성체"가 아니라 "성체 안"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가톨릭 사이트들을 검색하니) 전통적으로 이 곡을 미사의 성찬 때 불렸기 때문이라 하고, 또 가톨릭에서는 성찬 때 분급하는 전병(떡)을 "예수의 몸"(성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 합니다. 

성체 혹은 성찬의 떡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의 해석이 다르고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도 입장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떡의 의미를 두고 벌이는 쓸데없는 논쟁같긴 하지만 기독교 내에서는 역사도 오래되었고 나름 의미있는 논쟁이긴 합니다. 다만 온 인류와 우주를 위한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나눈 그리스도의 정신이 예배당 안에서 먹는 떡의 의미로만 국한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예배당 안에만 가두는 것이겠죠. 세상과 인류와 만물을 위한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그 떡 혹은 성체를 먹는다는 것은, 교회당을 나가서도 그리스도의 뜻과 일체된 삶을 살아낸다는 동의와 결심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시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습니다. 마치 마가복음(마르코가 전한 기쁜 소식)의 끝 부분이 오래된 사본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빈무덤으로 끝나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 더 자세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이 시에서 생략된 부활이 오히려 더욱 간절하고 강한 힘으로 글자들 뒤에서 생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치 마가복음의 고대 사본 마지막이 예수의 부활이 아닌, 예수의 죽음 뒤 묻힌 무덤의 돌문이 굴려져 열린 채로 끝을 맺은 것 처럼 말이죠. 

그리스도를 믿고 그 떡을 먹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는 늘 죽음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의 고백을 보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그 수난과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지만 또한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종교는 죽음을 바라보게 하고 죽음에 의미를 두며 극복하고자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극복하려 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맛본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마지막에 "Be for us a foretaste In the trial of death." 라는 고백과 간구를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시험과 위협 속에서 우리를 위해 먼저 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은 죽음의 위협과 공포 속에서 오히려 먼저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떠올리며 죽음을 극복하려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죽음과 부활의 경험은 단순히 교리적이거나 철학적인 고백 이전에 성찬과 예배 혹은 미사를 통해 얻어지는 감각과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 전통은 개인적인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신비들은 시대마다 종파마다 대하는 태도도 다르고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에 보편적이지는 않습니다. (추가 : 물론 심리적인 경험에 공통된 이미지나 은유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교리적인 문제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와 성찬을 통해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입니다. 그것들은 지극히 단순한 상징들에 의해 감각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단순한 고백과 음악, 빛과 어둠, 단순함"이란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중심에는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성찬과 예배의 중심에서 하나의 동일한 경험을 합니다. 나와 우리와 세상의 죽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슬픔이요, 공동체와 세상의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를 줍니다. 죽음을 담대히 이겨내고 두려움 없이 사는 이들도 많지만, 나같은 사람은 막상 그 죽음 앞에서 지극히 약해지고 초라해지곤 합니다. 나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그리고 도처에 만연한 작고 큰 죽음 앞에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죽음 앞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곧 약한 자의 죽음이요, 정의로운 자의 죽음이요, 참 사람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죽음을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그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님은 이제 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에 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의 결국을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부활을 보며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자신의 부활을 희망하게 됩니다. 매 죽음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스도가 미리 맛본 그 죽음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시간 상으로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맛보신 분이요, 신앙적인 의미로는 모든 인간보다 먼저 죽음과 심판을 맛보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맛 본 그분을 기억하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이 시는 이 노래는 그렇게 간절함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구절구절 써내려왔지만, 이 노래를 다시 들으니 이런 설명이 쓸모없는 사족으로 드러납니다. 가사와 선율,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모습과 공간의 느낌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들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음악이 갖는 신비한 힘입니다. 음악을 들으니 여기까지 써내려온 글이 사족처럼 느껴져 지우고 싶지만, 나름 졸면서도 끝까지 써내려온 내 자신을 격려하는 마음에 지우지 않고 글을 그대로 둡니다.

어느덧 한주일이 지나가고 밤이 되었습니다. 이 밤에 모짜르트의 Ave verum corpus를 들으며 지난 하루를 정리합니다. 혼자 듣다가 잠시 시간을 정지시키고 짧은 묵상을 써봤습니다. (전문적 지식이 없기에 짧은 시간에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기록해서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우리들의 삶 속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만족감과 욕망

[책]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열린책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