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리뷰] 이만열 교수의 한국현대사 강의를 듣고

[리뷰] 이만열 교수의 한국현대사 강의를 듣고

이만열 교수를 강사로 하는 한국현대사 강의가 있어 참여했다. 몇가지 이슈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여러가지를 들었지만 강의가 끝나고 기억에 남고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몇개 있어서 기록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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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해방, 광복, 건국"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MB정부가 들어서면서 광복을 "건국60주년"이라는 말로 "60"이라는 말에 강세를 두고자 건국논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되었다고 한다.  

하나. 항일운동, 독립운동은 1910년 이후에 눈에 띄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19년 이후로 활발해졌다고 한다.  1919년 이전까지의 독립운동은 "대한제국"으로의 복권이 주목적이었던 것에 반면, 1919년 이후로는 대한제국이 아니라 "민중이 중심이 되는" 대한민국으로의 출발과 복권이 주목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1919년부터 찾을 것인지 아니면 1948년부터 찾을 것인지는 이부분에 대한 역사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했다. 교수님은 뉴라이트의 주장대로 1948년 건국 주장은 일부 일리가 있다 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과 함께,  뉴라이트의 주장은 식민지사관과 친일의 정당화논리가 결합 되었기에 받아 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 도산 안창호는 당시 여러개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중개인이자 리더였다. 조직 행정가이자 정치가로서의 도산 안창호를 더욱 연구하고 살릴 필요가 있다. 연설을 준비하는 안창호의 일화는 내게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상당히. 

하나. 광복 후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않은데에는 미군정의 역할이 주요했다. 미군정은 당시 대한민국을 다스릴 정부관리와 행정체계를 일제시대의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친일파를 처단할 경우 대한민국의 친일 관료들이 사라져 행정의 공백이 생길 것을 염려한 듯 하다. 

하나. 해방 후 교회가 일제치하에서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가 있었다면 그 후로 이어진 친일청산과 민주화에 있어서도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았나 안타까웠다. 

하나. 4.19는 백성의 힘으로 부패한 정치를 바꾼 상당히 독특하고 의미있는 중요한 민주주의 역사다.   

하나. 지금의 대북정책으로는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 열강의 이해 속에서 북이 남에 의존하고 협력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 통일 모델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해법도 중요하지만, 남과 북이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호협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협력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는게 중요하다. 

직접 본 이만열 교수는 언론을 통해 본 사진보다 더 연로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자 처음에 느리게 시작된 강의는 갈 수록 더 힘이 붙고 분명해졌다. 유머와 여유가 있었고 무심코 하는 말 속에 다양한 시각들이 엿보였다. 근거와 사실을 먼저 얘기하고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역사학자로서의 보수적인 기질인 듯 싶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130분 정도 시간 안에 한국근현대사 전체를 소개하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노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근현대사의 몇가지 흐름을 일관성있게 볼 수 있었고 오늘의 한국사회와 내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이만열 교수와 함께 몇명이서 동태찌개로 간소하게 저녁을 먹었다. 이만열 교수는 특별히 다른 말 없이 조용하게 식사를 했지만 어색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첫만남은 강렬하나 그 후로 기억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시간이 지날 수록 묘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만열 교수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이제 며칠 지났지만 아무 정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며칠전 강의가 지금도 계속 생각되는 거 보면 확실히 그런 듯 하다. 

좋은 물음들을 들었으니 앞으로의 지식을 쌓아가는 생각의 밑거름으로 삼으려 한다.

[일상] 다짐

[책] 3세기때의 세례교육은 어땠을까? "사도전승" (분도출판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