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밍웨이와 겔혼
시대의 포화와 불길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나르시즘 혹은 개인적 트라우마에 대한 자화자찬과 자기연민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대와 세상의 트라우마는 늘 잊혀지고 외면당한다. 시대를 사르는 어두운 불길 속에 사는 이들에게는 시대와 자신의 구분이 없고, 시대의 트라우마와 개인적인 트라우마 사이의 간극도 없다. 한 개인이 곧 역사며, 역사가 곧 그 사람 하나다. 극단적인 시대에는 극단적인 이상함이 너무도 쉽게 드러난다.
시대와 타인 속으로 뛰어들어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 설 때면 판단과 비평의 잣대가 무장해제 된다. 단지 그들이 본 시대를 그들의 눈으로 다시 한번 숙연히 볼 뿐이다. 그들을 통해 나는 그 시대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안전하고 감성적인 슬픔으로 경험한다. 사실의 무거움은 여과되고 희석된 슬픔임에도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 시대와 그 사람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밍웨이에 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겔혼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겔혼에 대한 이야기에 감동을 느낀다고 내게 어떤 고귀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대의 포화 속으로 들어간 겔혼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술가적 공감을 갖기도 하겠지만, 오늘날 시대의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외면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할 듯 하다. 다큐멘타리와 역사와 인간의 슬픔을 드러낸 예술에대한 깊은 공감이 곧 현실에 대한 슬픔과 공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헤밍웨이와 겔혼을 보고 감명을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 모습에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듯 하는 예술과 영성의 한계와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