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유월의 뽀르소
6월의 시골은 농사의 이른 열매를 거두는 달입니다. 시골에서 교회다니시는 분들은 "첫열매"라하여 처음 익은 열매들을 신에게 바치던 구약성경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즈음에는 여러가지 곡식들을 교회로 자주 갔다주곤 합니다. 호박이나 오이, 토마토를 들고 교회당으로 가는 풍경이 재미있고도 정겹습니다. 도시에서는 볼 수도 없고 많은 것들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이토록 오래 전 모습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정감과 소중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 덕분에 한 마을에 사는 나도 떨어지는 콩고물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과일들을 한두개씩 얻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곤 하니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며칠 전에는 할머니 한 분이 뽀르소를 한봉지 배달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들에서 따먹던 뽀르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알이 굵어 먹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녀석들이었습니다. 한봉지를 얻어서 입안에 털어 넣어봤는데 시큼달콤한 맛이 말 그래로 정말 끝내 줬습니다.
지금은 글자로 뽀르소라고 썼지만, 며칠 전에는 정확한 이름이 “뽈소"인지 “뿰소"인지 확실히 몰랐습니다. 해서 검색을 해봤더니 원래 이름은 뽀르소가 아니라 보리수라고 합니다. 구글선생님 덕에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이름이 보리수라하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그 나무인가 싶었지만 그 보리수나무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 보리농사를 지을 때 보리가 익을 때쯤 열매가 맺힌다 하여 보리수나무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그 보리수나무였다면 뭔가 의미가 더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도 열매가 피처럼 빨간 것이 꽤 영험해 보이긴 했습니다. 한 움큼씩 손에 집어 입에 털어 넣고 오물대니 빨간즙이 입 안에 가득하더군요. 뭐라도 깨달음이 오겠나 싶어 눈을 감고 가만히 마음을 다잡고 있어보니 뭐 특별한 깨달음이 오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 뽀르소를 잡은 두 손이 어느덧 빨갛게 물들고 입고 있던 옷에도 그만 빨간 물이 들어버렸습니다. 마치 피처럼 말이죠. 그리고 잠시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 왔습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있지 않는 것 같다는 그런 아주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생각 때문에 오는 현기증이었습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갑작스레 현기증이 스쳐 지나갑니다. 마치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사라진 듯한 아찔함에 현기증이 나는 그런 이상한 때가 있습니다.
내가 느꼈던 현기증은 단순하게 그 빨간 뽀르소와 할머니, 그리고 유월이라는 이 독특한 시간들이 가져다 준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라든지 그 때 소녀였던 아이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아직 이 땅에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그 때 그 땅에 자라던 뽀르소들이 지금도 자라고 있고 이제는 그 때를 모르는 내게 그 때만큼이나 붉은 뽀르소가 내 손에 전해져 담겨져 있다는 그런 계속된 연결들이 내게 짧은 시간이나마 그 때를 느끼게 해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뽀르소를 가져다 준 할머니가, 60여년 전 이 땅이 아직 피처럼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기 전 유월의 이 맘 때 나처럼 뽀르소를 한움큼 입에 털어 넣으며 웃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 때의 할머니와 지금의 나라는 평범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세월의 간극과 뽀르소 열매의 겹쳐짐이 그저 가볍지도 또한 무겁지도 않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시큼하기도 달콤하기도 한 유월의 뽀르소 맛처럼 말입니다.
어느덧 며칠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산과 들 사이에 자라던 뽀르소들도 이제 슬슬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과 옷을 빨갛게 물들였던 그 피빗들도 이제는 었던 손도 이제는 다시금 원래의 살색을 찾았습니다. 이제 60년도 더 넘었던 그 옛날의 피빛어린 역사의 기억들의 상처도 사라진 듯 보입니다. 아직도 사회 이곳 저곳에는 그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채 왜곡된 망령으로 그 존재감을 외치며 남아 떠도는 듯 하지만, 우리네 삶 속에서는 잊혀진 듯 합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이 유월이라는 시간도 곧 지나가 버리고 잊혀질 듯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들에 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붉디 붉은 뽀로소는 내년 유월에도 다시금 그 붉은 피빛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후년에도 그 후년에도 말이죠.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내가 할아버지가 되면 나 또한 그 다음의 누구에게 이 붉디 붉은 뽀르소를 건네주며 그 뽀로소를 받는 누군가는 또 다시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작은 현기증을 느끼는 그 시간이 올른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