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36:9)

[일상] 죽음의 방문

밤이 깊었습니다. 적어도 아이에게는 그렇습니다. 잠자리에 든 아이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을 뒤척입니다. “왜... 잠이 안 와?" 내가 묻습니다. 요즘 아이가 잠을 잘 못 이루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퉁명스럽게 '그럼 책읽다가 자'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대답합니다. "응. 잠이 안 와". 왜 그러냐고 내가 묻습니다.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빠, 죽는게 무서워”. 죽는게 무섭다니 정말 쌩뚱맞은 말입니다. 왜 그렇게 느끼냐고 내가 묻습니다. "죽는게 무섭고 걱정돼"라고 대답합니다. 어떤게 무섭고 걱정되냐고 묻습니다.  "계속 잠자야 하잖아"라고 대답합니다. 너는 요즘 매일 더 자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냐 그러면 더 좋은 것이 아니냐라고 되묻습니다. "아니, 그런 잠은 싫어. 계속 일어나지 못하고 자는 죽는 건 싫어. 놀지도 못하고 사람들도 볼 수 없고... 무서워". 아이는 무서워합니다. 잠시 생각한 후에 “누구나 다 죽어 … 그래서 삶이 소중한 거야"라고 내가 대답합니다. 아이는 “응” 대답하고 잠이 들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이방에서 소리가 납니다. 아이방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납니다. 아이가 거실로 나옵니다. 거실에서 책을 읽던 엄마가 아이를 맞아 줍니다. 아이가 많이 웁니다.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웁니다.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아이가 죽음이 무섭다고 대답합니다. 엄마가 아빠가 죽음에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냐고 묻습니다. 아마 아까 방에서 나와 아이가 나눈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아이는 아빠가 말하길 죽으면 다 끝이라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들었나 봅니다.

엄마가 아이 말을 듣더니 아이를 안은 채 말을 해 줍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야. 죽음 후에는 소중한 사람들과 만들 수 있어. 죽음 후에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볼 수 있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야". 대답해 줍니다. 그리곤 아이와 함께 이야기합니다. 하루 종일 있었던 좋은 일들에 대해 묻고 아이는 어느새 눈물을 닦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로보트 이야기, 태권도 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합니다. 나는 뒤늦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얘기를 듣다가 다시금 자기 방으로 돌아가 누운 아이 옆에서 아이를 두드리며 왠지 미안한 마음에 아이를 재웁니다.

내게 죽음의 공포는 20살이 되어서야 찾아 왔는데, 아이는 너무 일찍 죽음을 만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빠보다는 엄마의 품이 더 안정감이 있고 따스한 이야기가 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곤 문득 성경의 출애굽기(이집트 탈출기)에 적힌 난해한 성경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애굽기 4장 21-26절)

어두운 숙소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의 공포에 맞닥드리게 된 모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지혜로 그 모든 죽음을 넘긴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앞으로 자신의 동포를 구하기 위해, 오히려 이집트의 수 많은 아이들이 죽고 아이를 잃은 부모의 울부짖음을 듣게 될 그 가족이었지만 죽음의 공포를 넘긴 이들은 수 많은 이집트인들의 죽음에 그저 기뻐하지만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음 무서운 것이고 삶은 소중한 것임을 미리 경험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단지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더욱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며 타인의 생명 또한 소중히 여기는 그런 삶만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젊음의 때에 느꼈던 죽음의 공포는 이제 많이 흩어졌지만, 아직도 그 두려움과 공허감이 남아있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소중함을 발견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리고 아이또한 그것을 조금이나마 느낀 까닭인듯 하고요. 갈 수록 살아있다는 것이, 그리고 내 사람들이 아직 옆에 남아있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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