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물건을 사고 파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족감과 욕망"인 듯 합니다.
5,6년 만에 작은 가게에서 연매출 50 ~ 60억 수준의 중소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에서 일하는 - 사장은 아니고 그냥 그곳에서 오래동안 일하는 분과 얘기를 나눴는데요, 그 회사에서는 똑같은 물건에 상표만 달리해서 판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회사 브랜드를 검색하던 중 그 회사 제품보다는 못하지만 성능이 우수한 제품에 대한 추천글과 낯선 브랜드를 발견하고 그 브랜드 얘기를 했더니, 피식 웃으면서 실은 그 브랜드도 자기 회사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장에서 똑같이 생산된 제품에 브랜드 로고만 다르게 찍어서 시장에 제품을 푼다고 합니다. 그러면, 물건이 잘나가는 시기에는 사람들이 비싼 것을 사고 물건이 잘 안나가는 비수기에는 사람들이 싼 제품을 산다고 하는데요, 회사 입장에서는 비싼 것을 팔아야 이득이 많이 남긴 하지만, 싸게 팔아도 이득이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이익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제품은 같지만 두 개의 브랜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발목을 잡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더 싼 제품을 사도 되지만, 더 비싼게 더 좋으리라는 생각때문에 더 많은 돈을 주고 비싼 제품을 산다고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 포장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제품의 성능이 똑같은데도 싼 제품을 사서 쓴 사람이 나중에 더 비싼 제품을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현상인듯 합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는 단순히 그 물건이 가진 기능과 필요에 의해서만 제품을 사진 않는 듯 합니다. 필요 이상의 무엇인, 만족감과 욕망이 작동되는 듯 합니다. 더 좋은 것을 같고 싶고 남들이 갖는 것 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인 것이죠.
쉽게 생각하면 그런 소비자들의 모습이 참 바보같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늘 모순 덩어리인 것을 생각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면 그런 모습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나도 이왕이면 더 싼 것을 찾으려는 실용적인 태도와 더불어, 이왕이면 더 비싼 것을 찾으려는 허황된 욕망을 쫒는 선택 속에서 늘 갈등을 하고 있으니까요.
전에 어느 유명한 디자이너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을 파는 것이다"라는 그런 뜻의 말이었습니다. 그 글을 보면서 '이 사람은 참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구나' 고개를 끄덕였더랬죠. 실은 종교계에도 이런 인간의 만족감과 욕망을 잘 이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물질축복이나 성공주의"를 주무기로 하는 부흥강사들이었습니다. 부흥강사들을 보면서 (나도) 사람들은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의 메세지를 들을 때마다 '저 사람들은 사람들의 욕망과 만족감을 잘 알고 잘 이용하는구나. 꽤 노력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그런 방법론과 태도가 너무 상업적이고 복음과 먼 것들이 많아서 문제였던거지만요.
만족감과 욕망은 실은 물건이나 어떤 제품을 소유함으로서 얻어지기엔 그 한계가 있습니다만, 물건이나 제품을 소유하는 것만큼 쉽고도 간단한 방법또한 없습니다. 단지 돈만 있으면 되는거니까요.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돈이 많지 않고, 또 소유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소유를 통해 만족과 욕망을 채우려는 것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 만족감과 욕망을 어떻게 채우고 충족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상품을 파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만족감과 욕망을 더 많이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만, 인생이라는 한 복판에서 길을 가는 우리 자신에게는 오히려 그런 만족감과 욕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더 필요한 것이겠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부터 만족감을 얻고 욕망을 승화시키고 있는가!' 어느 설문조사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보통때보다, 우울하거나 외롭거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온라인으로 제품구매를 더 많이 한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물건의 필요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었죠.
그러고 보면 나도 뭔가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곤합니다. 가끔 사지도 않을 큰 것들을 온라인으로 기웃기웃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사는 것은 주로 작은 공책이나 연필이라 출혈이 없긴 하지만요.
만족감과 욕망. 이런 말은 실은 굉장히 종교적인 말이라 생각합니다. 종교는 사람의 소유를 부정하기 보다는 소유 이전의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눈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고요. 어떤 종교가 되든지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시간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사회는 점점 종교에서 멀어져 가는 듯 보입니다. 내 자신을 비롯해서, 한국사회의 종교계가 보여주는 수준을 볼 때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듯 합니다.
하지만 정치가 썩었다고 정치에서 관심을 끊게 되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으로 피해를 볼 수 있듯이, 종교계가 썩었다고 종교성마저 버리고 거부한다면, 삶을 살아가고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행스런 것은 기존의 종교가 하던 역할은 요즘은 심리학이나 예술, 과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근본적이고 원색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종교의식을 가르치는 나로서는 아쉬움도 많고 위태로운 시대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아닌 다행인 듯 합니다. 신비가 상실된 소유나 물질로 얻어지는 만족과 욕망만이 아니라, 좀 더 넓고 큰 의미에서 사람과 삶과 세상을 바라보고 만족을 얻을 수 있게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심리학이나 예술, 그리고 요즘의 과학은 기존 종교가 했던 부분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듯 하지만요.
어쨌든, 다시금 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봅니다. 나는 지금 만족스러운가, 나는 지금 내 근원적인 욕망들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거나 아멘이라고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영혼의 층이 얇아지고 존재의 뿌리가 흐려진 까닭인 듯 싶습니다. 다시금 갖고 있는 것과 갖고 싶은 것과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과 나와 함께 있는 분들 사이의 균형과 깊이를 맞춰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이 허해지고 삶과 생명의 뿌리가 흐려지다보면 자칫 어느 한순간 밖으로 무너지는 참담함을 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