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는데 갑자기 머리맡에 둔 전화기가 울립니다.
"거기 어디예요". 전화기 너머로 앳된 할머니 목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네. 교회입니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잠 자다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라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부지불식가운데 대답을 하고는 스마트폰 화면의 시계를 봅니다. 새벽 4시. 뭐, 거의 깰 때가 되긴 했지만, 내가 알아서 깨는 것과 예기치 않던 전화에 깨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죠.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거야'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그래도 다시 말을 잇습니다.
"무슨일이시죠?".
그사이 침을 여러번 삼킨 후에 마치 이미 깨어있었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전화기 너머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날 데리로 와요."
..."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묻습니다.
"데리러 와요. 교회 가야 해".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게 확실합니다.
"지금은 차량 운행이 안됩니다". 내가 다시 말을 잇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혼잣말같은 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소리가 안들려. 뭐라 그러는지. 여기는 서울인데 날 데리러 와요"...
"뚝".
그리고 전화가 끊깁니다.
지난 몇 년간 몇 번씩 오는 전화였습니다. 올해도 봄에 한번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근처에 있는 전화번호로 비슷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내용은 같았습니다. 전화를 건 할머니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에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전화를 받자마자 큰 소리로 대꾸를 했습니다.
"일단 교회로 오세요."...
전화기 너머로 중얼 중얼 소리가 나면 또 큰 소리로 대꾸를 합니다.
"일단 교회로 오세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슨 얘기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일단 교회로 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몇년간 전화를 하는 걸 보면 기억의 어느 끝자락에 교회가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되어서 였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전화가 두번 왔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도 한번 전화가 왔습니다. 역시 같은 말로 대꾸를 했습니다.
"일단 교회로 오세요".
그렇게 새벽과 아침에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는 예배시간이 되어서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량 운행을 돌고 교회당 언덕으로 올라서는데 낯선 할머니 한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교회 앞 언덕 밑에서 언덕 위로 할머니 한분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혹시 그 할머니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어르신들의 옷차림과 말과 행동에는 한평생 살아온 삶의 궤적들이 남아있어서,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분의 삶의 자취를 조금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는 근 90세가 넘은 듯 보였는데 소녀처럼 앳되면서도 옷을 이쁘고 곱게 차려입으셨습니다. 연세가 있으신데도 서있는 모습도 똑바르고 걸음걸이도 바르고 걷는 속도도 일정한 것이 몸가짐이 참 바른 삶을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할머니 옆으로 와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어세오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 광고시간에 교우들 중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과 장로님이 할머니를 기억하고 저에게 소개를 시켜주십니다. 아주 오래 오래 전에 교회를 나왔는데 서울로 이사를 갔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귀가 많이 어두우셔서 소리를 잘 못들으셨습니다. 다행히 나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고주파의 낭랑한 소리를 원하는 사람의 귀에 들리게 할 수 있는 내공이 있는지라 할머니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대화를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자초지정을 물어보니 아마도 근래 다시금 시골로 거처를 옮기신 듯 합니다. 식사를 하고 오후 예배까지 드리고,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옆 동네지만 연고가 없어서 그 안으로 가까이 들어가지 않던 동네에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덕분에 그 마을 깊숙히 들어가 보는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할머니는 속된 말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분이었습니다. 지금이 몇 십년 전인 걸로 착각을 하거나, 방금 전에 들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증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차 안에서 같은 얘기를 대여섯번을 반복하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할머니는 수십년전에 교회에서 '권사'라는 직분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신 분이었습니다. 여러 얘기를 하면서 할머니는, '다시금 시골로 왔는데 계속 있게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속 교회를 나오겠다' 말씀을 하셨고, 나는 '며칠 뒤 댁으로 찾아뵙겠다'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력이 약해지고 정신도 혼미해 지시곤 하는데, 할머니는 과거의 기억이 희매해져 가다가, 어느때는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수 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상태가 반복되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희미한 기억과 혼미한 상태 속에서도 수년간 계속해서 찾았던 것은 수십 년 전 습관적으로 나왔던 교회당이었습니다.
사람의 삶을 지탱해주고 유지해주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을 것입니다만, 이 할머니에게는 교회당이 그런 것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댁으로 들어가시는 할머니에게 또 고주파 낭랑한 소리로 크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밤이고 낮이고 괜찮으니 생각나면 전화하세요."
주변에 있는 다른 분들이 고개를 돌려 돌아볼 정도로 소리가 컸나 봅니다. 할머니는 소녀같은 얼굴과 표정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고마워요".
대답을 할 때 할머니의 기억이 수십년 전으로 가있는지 아니면 지금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니 거기에 의미를 두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단지 나로서는 몇년간 전화기 너머로만 듣던 목소리를 직접 보게 되는 기묘한 만남에 오히려 즐거운 맘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돌려 마을을 빠져나오다가 백미러를 봤습니다. 저 멀리 길 가에서 옆에 놓인 꽃들을 바라보며 손으로 어루만지는 할머니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곤 마음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와주셨구나'하는 그런 생각 말이죠. 지난 몇 년간 이 작은 시골교회로 오신 분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갑자기 이곳이 생각나서 오신 분이 한 분 더 늘어났습니다. 나는 그저 이곳에 있을 뿐인데 감사하게도 이곳의 그 무엇을 기억하거나 이곳에 있는 나를 기억하시고 자신의 발로 먼저 찾아 오신 분들입니다.
오늘도 바쁘게 하루가 지나갔지만, 예기치 않았던 할머니의 방문으로, 누군가에게 기억이 되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살아있는 의미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졸리기도 하고 글자들과 생각들이 꼬여서 이 감정과 느낌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이 부드러워지는 이 소중한 의미와 감동들이 잊혀지지 않고 내 모든 날들 속에 차고차곡 쌓여 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 [추가] 할머니는 몇주 나오시다가 다시금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연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